골짝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맑고 고와서 길음이라고 썼단다. 북한산 모과나무 산등성이를 돌아 삼각산 납작집 돌무덤 위로 구름이 한덩이씩 흘러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 길음, 속에서 나는 한 여자에게 고백했다.
그해 겨울엔 가뭄이 길었고 봄엔 내내 햇무리 했지. 다시 여름이 오고 누구랑 누구랑 결혼을 한다기 진땀을 빼며 찾아갔더니 북한산 모과주 기막힌 한상차림 잔칫상에 취해 깨어난 것은 그녀와 나였다.
이 동네는 원래 길음이었는데 나중에 송천이 되었다고. 길음 물소리에 취해 자란 커다란 소나무 아래 맑디맑은 샘이 하나 있다 하여 송천이라고 썼단다.
모두 모두 납작집이던 시절 누군가 지붕 위에 지붕을 해 얹고
누군가 마당 밑에 굴을 파고 굴 아래 다시 굴을 파고
해봐야 결국 물소리나 더 들으려고 그런 건 아닐 테고.
가까운 숲이 인간을 고립시키는 이유? 다가서면 나무들은 죄다 잎사귀를 촉촉 세워 다가올 이상한 계절의 꽃말을 씨 뿌리고 있으니까. 인간은 인간을 고립시키지. 가까워도 멀어도 두갈래 바큇자국이 길게 파인 길 위에 물이 돌고 풀 위에 돌이 쌓이고 먼지 위에 먼지가 앉고 단단하게 뭉쳐 굳으면
한방울 비에도 금세 서로 무거워지고 말 거 아닌가.
밤이면 그녀와 나는 서로의 몸을 뒤져 가장 흐린 부분을 매만지고
그건 어쩌면 물소리에서 시작된 이 동네의 내력을 한껏 마시려는 몸짓.
아침이면 골목 끝에 골목이 더해지고 그 끝에는 온통 파헤쳐진 길음2재정비촉진구역, 놀라워라 밤새 서로가 서로를 헤집었더니 저 골목 끝에 도시가 사라지고 밑바닥까지 온통 시뻘건 황토였다니.
언젠가 북한산 모과나무 산등성이에서 집채만 하니 굴러 떨어지는 구름 덩어리를 받으며 한 여자에게 고백을 하기는 했지. 그러니까 길음으로 귓바퀴를 덥히고
'내 사랑 쓸모없는 쓸모없는 당신과 여기에 묻히겠소' 라거나
'쓸모없는 쓸모없는 내 사랑 여기에 당신과 나 묻히자' 라거나
쓸 때마다 길음 송천 시절의 나는 과연 시인인지 밀고자인지
재개발지구로 가서 재개발되는 광경을 두 눈에 담아오곤 하는데
재개발지구에서 피어나는 재개발 장미 한송이를 그녀 머리맡에 꽂아두곤 하는데
지난봄엔 '송천동'이라고 시를 썼는데 잠시 시에 등장한 욕쟁이 앞집 노인이 그예 죽었더군. 그녀 머리맡에서 시든 장미와 시가 실린 잡지를 들고 길음2재정비촉진구역으로 가서 노인의 부음을 함께 묻어두고 돌아갔지. 누군가
악무한의 명명법으로 저 물소리 납작집 둔덕을 한 삽에 퍼갔나?
현대백화점, 롯데백화점, 이마트 사이에 황토 둔덕 하나. 누군가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저 바다 밑바닥 백상아리 울음소리라도 들으려는 요량인가?
어쩌면 인간은 지구라는 표면에 내내 살고 싶었기에 별의 궤도를 측량하고 이름을 다시 지은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그 표면, 껍데기, 겉, 얼굴 표정속에서 다른 곳에서 살고 다른 곳에서 죽는다면
다른 누군가는 고통을 받고 다른 문장으로 다른 이름을 가질 테니
이 고단한 재개발지구에서 피어난 한송이 식은 꽃처럼
그녀와 내가 마저 불러주어야 한 이름들은 또 얼마나 남았을까?
파고 파고 또 파내어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가보자.
비록 그녀와 내가 헤엄을 쳐서 메마른 길음 송천을 건너는 법을 영영 모른다 해도
그녀와 나는 물살에 몸을 맡기고 어딘가로 떠내려가겠지.
이름에 다시 이름을 쓰며, 이름에 다시 이름을 부르며
창작과 비평 170호 (2015년 겨울) 에 게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