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평론 - 서평] 짙푸른 현실의 대지 위에 서기 위하여
서 평
짙푸른 현실의 대지 위에 서기 위하여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주인석의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
장 귀 연 (인류 90)
1. 선배의 충고
이 시대 젊은이들의 자화상을 가장 잘 형상화하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 문학상들을 휩쓸고 당당히 베스트셀러 목록에 진입하고 있는 몇 개의 소설들이 있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주인석의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
문학상 수상이나 베스트셀러가 꼭 좋은 작품이라는 보증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러한 사실은 한 세태를 읽을 수 있게 해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문학은 현실의 한 구성부분이면서 현실을 반영한다.
단지 그뿐 아니라, 우리가 이 작품들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것은, 이 작가들이 우리보다 10년 안쪽의 나이밖에 더 먹지 않은 젊은 작가들이고, 그래서 이 시대 젊은이들의 현실과 생각을 반영한다고 말해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중의 두명(이인화, 주인석)은 아크로와 도서관과 5동앞 잔디밭에 아직 그 체취가 배어 있을 관악의 선배.
그들이 이제 그 때의 젊음을 고백하려고 한다. 자하연 연못의 물에 적시었고 버들골 뒷편 숲속에 흩뿌리기도 했었고 아크로에서 타오르기도 했었던 젊음,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많은 관악 학우들의 손에 이 소설이 들려 있다. 선배들의 고백과 충고. 그러나 그것은 교훈인가, 배신인가.
나는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자아분열을 겪어야 했다. 공감하기도 하고(아직도 버리지 못한 소부르조아적 문학청년 기질?) 극심히 반발하기도 했다(현실과 운동 속에서 단련된 나?). 여기서 출발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자아분열의 위험에서 면제될 수 있는 관악학우는 그리 많지 않을 터이므로. 또 그 지점에서 어떻게 나가야 하는가는 그들의 후배인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므로.
2. 80년대 세대의 자기 고백
이 세 소설들은 모두 일종의 젊은 날의 ’고백서’ 또는 ‘참회록’이다. “이 이야기는 1980년대에서 1990년까지의 자기총괄서이기도 하다.”(박일문)
세 작가들의 나이를 보면 이들의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 60년대 초에 태어나 80년대 초에 대학에 입학한 80년대 학번들, 즉 죽음처럼 어둡고 암울했던 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불안하게도 푸르기만 한 20대라는 개인의 청춘이 맞물려야 했던 불행한(?) 세대이다. 20대 후반에서 그들은 1990년을 맞았다. 그리고 순수했을지언정 치기어리고 철없었을지도 모르는 청춘을 바라본다. 청춘의 한장이 넘어갔다. 서른을 바라보는 그들은 “길찾기”(박일문)를 해야 한다. 그것이 이들의 소설이다. 이들은 어느 길에 서 있는가? “1992년,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박일문)
여기서 나는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그리고 지금 재학중인 대부분의 관악 학우들은) 이들과 10년에 가까운 세대의 차가 있다. 나는 70년대 초에 태어났으며, 당당히 80년대를 마감한 90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하였다. 80년대에 대한 나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79년 라디오에서 계속 비장한 음악만 틀어주던 어느 가을날 아침, 그리고 그 다음 해 ‘광주’니 ‘학살’이니 ‘계엄령’이니 하는 어른들의 소리낮춘 수근거림.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국민학생이었던 내가 그 말들의 의미를 알아차렸을 리는 만무하였고,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라면, 87년 박종철 열사의 죽음과 전 국민의 가슴에 물결쳤던 슬픔과 분노의 시기. 그러고나서 곧 교실에서 수업 받고 있는 중에도 멀리 산넘어 날라오던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6월이 왔고, 이미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던 나는 호기심에서 괜히 시내에 나가 기웃거리면서 처음으로 ‘대학생들 데모하는 것’을 실제로 구경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것들이 지금 대부분의 관악 학우들이 80년대를 회상할 때 느끼게 되는 보편적인 방식일 터이지.
그러나 이 선배들은 내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던 바로 그 물결 속에,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가슴 벅찬 희망으로 가득찬 그 물결 속에 당당히 서 있었을 것이다. 80년 광주, 냉혹하게 번쩍이는 얼음장 아래 겨울의 세월, 그 속에서도 마침내는 꽃필 것이라고 믿고 뿌리던 꽃씨와도 같았던 어려운 투쟁들과 열사들, 87년 거리의 불꽃, 대선 때 백기완 선생님과 같이 했던 대학로의 집회. 92년 이제 이것들은 역사라고 불린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 그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메타포의 유희를 해온 것이다. 영화관 속에서 운동의 그림자를 투영시키며 산 것이다.... 메타포는 절대적이다. 우리가 자신의 모습에서 청년 레닌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우리가 그처럼 용감할 수 있었을까.”(이인화) “극장 밖의 땡볕 속에 나서자마자 안에서 맛본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관객처럼 나는 시간만 낭비한 것이다. 시간만. 85년 봄에서 90년 봄까지. 나의 젊음은 악몽 같기도 하고 화면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하얀 스크린 같기도 하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무수한 검은 그림자. 끊임없이 스크린에 희망과 욕망을 투여하던 내가 별안간 자신이 영화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쓰디쓴 인식.”(이인화) 또한 주인석은 내가 앞서 말했던 80년대의 역사에 대해 “한 편의 거대한 희극”이라는 타이틀을 붙이면서 이렇게 끝맺고 있다. “80년대의 희극은 막을 내리기 시작한다. 에필로그만이 남았을 뿐이다. 무대 앞에 연기자 한 사람이 나와 관객들을 향해 에필로그로써 변명한다. 그 에필로그는 이런 것쯤이 아닐까. 존경하는 관객 여러분, 이제 역정 내지 마세요. 이것이 올바른 결말이 아니라는 건 저희들도 잘 아니까요. 저희들 머리에는 금빛 찬란한 전설이 떠돌았었는데 모르는 사이에 그 전설은 씁쓸하게 끝나고 말았군요.”
그들에게 80년대의 역사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은 하얀 스크린”이며 “씁쓸하게 끝”난 “한 편의 거대한 희극”이란다.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학교에서, 거리에서, 공장에서, 매 시기의 전선에서, 이제 투쟁이다, 투쟁을 선언하며, 아스팔트 위를 내달리며, 눈물도 함께 뿌렸다. 청춘도 함께 불살랐다.... 고통 속에서도 우리가 걷어찬 안일한 꿈과 희망과 미래들,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우리는 보다 더 큰 희망과 더불어 사는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박일문) 그렇게 살았던 선배들의 지난날들이 바로 그 선배들에 의해서 “전설”일 따름이고 “위험한 놀이”(이인화)였다고 선언된다. “대성리 강가로 엠티 가서 밤새 레닌을 얘기하던 밤, 2학년 때 건대에서 잡혀 실컷 두들겨맞고 구류 살고 나와 며칠을 앓아 눕던 기억. 미제의 용병 교육, 전방 입소 결사 반대... 신림극장 사거리에서 두 선배가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던 4월의 아침. 잿빛 하늘 비 내리던 아침 11시 박종철 형의 장례식. 계속되는 가투에 지칠대로 지쳐 찾아가던 87년 유월의 자취방”(이인화)의 기억이 시간낭비이고 아무것도 아닌 無로 되어버린다.
아, 그러면 2000년대쯤에 우리는, 수많은 젊음이 떨어져갔던 91년 5월의 함성을 “죽음의 굿판”(김지하)에 낭비한 치기어린 젊음이었다고 부끄럽게 회상하게 될 것인가? 이것이 이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남겨주는 교훈인가?
그러나 그 교훈을 순진하게 따르기에는 어쩐지 나는(우리는) 미심쩍다. 그 전에 살펴보아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우선 이 선배들에게 그런 선언을 하게 만든 것은 ‘80년대와는 다른 90년대’에 대한 인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90년대로 넘어가야 한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90년대로.
3. 90년대, 이념의 위기와 포스트모더니즘
광주의 거리를 검붉게 도색했던 피와 죽음에서 원죄의 꽃으로 80년대가 피어났다면, 90년대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굵은 표제 아래 전날까지만 해도 야당의 총재였던 사람들이 통치자의 두 팔을 치켜올리며 환하게 웃음짓는 화려한 정치쇼에서 시작한다. 쿠데타와 수천명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계엄령, 술집에서 친구에게 말 한마디조차 마음놓고 할 수 없는 폭압적인 군사독재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역사와 사회라는 주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80년대 말 허울이나마 民選으로 정권이 탄생하였고, 게다가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의 해일을 몰고 왔다. “내가 완전히 대열을 이탈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도저히 더 견딜 수 없었다.... 고르바초프의 연설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그는 소비에트 대의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레닌의 제국주의론과 자본주의 일반 위기론을 오류로 선언하고 폐기했다.... 아, 그때 후배들에게 제국주의론을 읽히고 있던 내 심정이 어떠했던가.”(이인화) 자본주의 모순과 정면으로 대치하고 있었던 사회주의권이 멸망하면서 ‘역사’, ‘사상’, ‘혁명’ 등의 단어는 점점 그 무게를 잃고 한없이 가벼워져 간다. 원죄의식처럼 지식인을 사로잡고 있었던 그 단어들이 이제 웃음거리로 치부되어 버린다.
그 발생지인 서구에서는 벌써 10년도 전에 한물간 포스트모더니즘이 갑자기 남한 사회에 상륙하여 판치는 현상도 이러한 정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작년부터 서점가의 책제목을 도배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는 이제 너무 많이 들어서 유행 지난 옷처럼 무감동하게 느껴지기까지 할 정도이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소설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가장 잘 형상화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이들은 지금 현재의 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라는 인식 위에 서있다. “나는 식민지 반봉건 사회에 태어나서, 제 3세계적 개발독재 사회에서 교육받고, 예속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에서 젊은 날을 보냈으며, 이제 포스트모던 사회로 이민가고 있다. 나는 혼란스럽다. 나는 되돌아보고 싶은데 뒤돌아볼 틈도 없다. 나는 나의 뒤가 불안하다. 그리고 나의 앞길은 너무나 공포스럽다. 나는 전율한다.”(주인석) 이러한 인식이 이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 무척 친근하다. 이인화의 소설 제목부터가 그러한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대답은 결국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인 것이다. 作中 인물인 은우는 말한다. 나라는 自我는 存在가 아닌 不在이며 존재의 결핍이다. 실재가 아닌 환상이다. “확신의 기초인 <나>는 경험과 인식을 밑받침하는 절대적인 지적 기초가 아니”며 “나의 의미는 영원히 유보”된다. 정임도 말한다. “인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되고자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나의 환상이다.... 애초에 내가 있고 내가 원하는 모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모델이 되고픈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의 흔적으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라는 말이 가리키는 실재는 없다. 내가 꿈꾸는 레닌을 통해 내가 존재했던 것이다.”
이러한 언명들이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적인지를 굳이 설명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 같다. 다만, 무한히 열려진 시니피앙의 차이의 유희에서 해체되어가는 주체의 죽음을 이야기한 데리다나, 현실은 이제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의 구성이나 시뮬레이션(모사)이라는 보드리야르를 잠깐 상기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 빠져들어갔던 함정도 동시에 떠올린다. 보드리야르는 민중이나 계급을 변혁의 주체로 상정하는 것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난 망상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대중은 그들에게 어떤 임무를 부과하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다. 정권의 쇠파이프에 맞아 스무살의 젊음을 마감했던 강경대 열사, 그의 죽음이 불을 당긴 거리의 불꽃에 갑자기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우라”는 일갈로 찬물을 끼얹었던 김지하 시인도 생각난다. 그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그것이 어떤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던가도 안다.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꿈꾸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이데올로기로 기능한다. 억압적 체계와 주체와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억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담론이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모든 총체성에 대해 전쟁을 수행하자는 료따르의 선언은 역시 하나의 체계이고 또다른 억압형태에 다름아니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은 데리다가 스스로 인정하듯이 자신이 해체시키고자 했던 이성의 체계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아류에 불과할 뿐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어느 편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지도 우리는 안다. “이데올로기 과잉의 시대, 욕망 과잉의 시대”(박일문)을 반성하는 이 선배들은 채 그 반성을 시작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도 못한 스무살 경대의 죽음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이인화는 운동권 청년 규진에 대해 “레닌의 환상으로 고여드는 웅덩이의 물이었고, 유령이었고, 하이에나였다”라고 말한다. 규진은 맹목적인 광기의 환상 속에서 자멸하고 마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정권의 쇠파이프는 그렇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의문부호를 찍을 수 밖에 없다.
4. 포스트모더니즘의 전략 - 형식에 대하여
“나는 플롯이나 갈등, 묘사나 서술 같은 소설의 정공법은 모른다.”(박일문)라고 오만하게 선언하듯이 이 소설들은 정통적인 소설기법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쓰여져 있다. 이렇게 “형식과 의미질서의 구속성을 아예 무시”(이남호, 「살아남은 자의 슬픔」 評)해버리는 기법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새로운 기법이라고 흔히 이야기되어지는 패러디나 패스티쉬(혼성모방) 또한 이들의 작품에서 많이 눈에 띈다. 우선 이 세 소설들의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셰익스피어 「리어왕」의 한 대목에서,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은 니체의 저서 제목에서 패러디한 것이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브레히트의 시 제목이다. 박일문이 이 글의 화두라고 밝히고 있는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조차도 알고 보면 루 살로메의 소설 제목인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각 장의 첫머리마다 붙인 기존 시인의 시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서의 수많은 시와 노래 가사의 인용,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여러 희곡들, 즉 이 소설들에서 차용되고 있는 수많은 인용문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작품과 작가(글 쓰는 주체) 사이의 관계이다. 주인석의 소설은 평이한 3인칭 시점으로 끌고 나가는 듯 싶다가도 갑자기 작가가 툭 튀어나온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이 그러하다. “그날 밤 상우는 이런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의 꿈이 이런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의 꿈마저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 다음날 그는 간밤의 꿈을 기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인화의 소설에서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은우와 진짜 이 소설의 작가인 이인화가 구별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는 소설의 제목인 동시에 그 소설 속의 인물 은우가 쓰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독자는 소설 속의 은우의 작업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진짜 작가인 이인화의 소설쓰기도 따라간다. 이러한 방식은 완성된 체계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전략이다. 즉 작가는 완결되고 닫혀 있는 한 소우주로서의 작품을 독자에게 휙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검토하고 비판하고 괴로와하면서 글을 써나간다. 그리하여 열려진 체계로서 독자와의 대화를 꿈꾼다.(그러나 그것이 진정으로 환하게 열린 자유일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이러한 기법은 그리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으로 쿤데라의 「불멸」을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인화의 소설 형식은 「불멸」과 거의 비슷하다.(그러나 그보다는 덜 전위적이다.) 주인석도 자신의 작품은 쿤데라의 방식과 분위기를 빌어온 것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하고 있다.
쿤데라가 누구인가?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가고 이마골로기(lmagology=lmage+ology)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엄숙히 선언하는 산상의 예언자. 그는 「불멸」에서 “우리의 이미지란 단순히 하나의 겉모습이고 그 뒤에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독립된 우리 자아의 진짜 실체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믿는 건 순진한 착각”일 따름이며, 오히려 “우리의 자아가 포착할 수 없고 묘사할 수 없으며 혼동스런 단순한 외관에 지나지 않는 반면 유일한 실체는” “우리의 이미지”라고 말한다. 현실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자아가 이미지일 따름이라면 역사도 이미 끝장나버렸다. “이데올로기란 연동장치에 의해 회전하며 전쟁과 혁명과 개혁을 촉발시키는 거대한 바퀴와 같다. 이마골로기의 바퀴도 역시 회전하지만 그러나 이 회전은 역사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이데올로기들은 역사에 속해 있으나, 이마골로기의 통치는 역사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처럼 이 작가들이 자기 작품의 모범으로 삼고 있는 쿤데라의 말을 통해서 그들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형식에서 나타난 이인화의 전략을 하나더 이야기하자. 이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되어 있지만, 단일한 화자가 등장하여 그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전통적인 방식이 아니라, 장마다 화자가 바뀌면서 각자 그 나름의 방식과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상의 문제에 대해 이인화 스스로 소설 속의 은우의 입을 빌어 그 의도를 설명한다. “내 소설에는 단일한 화자를 통해 나타나는 작가의 고유한 통일적 자아가 없어. 내소설 역시 ... 똑똑하고 논리적인 작가가 확신을 가지고 쓴 현실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야. 말하자면 내 소설은 가능한 한 많은 입장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감싸는 대화를 꿈꾸는 것이지.” 자아와 세계를 단일한 논리와 체계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 확신있는 해답을 내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지 가능한 것은 여러 입장의 시각을 그대로 보여주기만 하면서 그들간의 의사소통을 꿈꾸는 것,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상대주의 전략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이러한 형식은 다만 작품에 신선함을 불어넣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에 의해 고의적으로 의도된 것일 터이다. 언어게임 규칙의 이질성을 인정함으로써 각개 판단의 다양성을 서로 인정해야 한다고 한 료따르나, 절대적 진리를 찾는 헛된 노력을 포기하고 대화를 통한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로티의 신실용주의가 연상된다. 이러한 말들은 일견 무척 민주적으로 보인다. 이들은 이것이야말로 전체성에 대항하는 유일한 전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언가 빼먹은 것이 있다. 바로 계급의 문제!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하여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단행하는 노동자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정당한 요구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보면 파업 농성중인 공장에 폭력 구사대와 공권력의 힘까지 동원하여 강제 해산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면 이 두가지 다른 주장에 대하여 ‘서로의 입장에서 정당하므로 그 이질성을 인정하자’고 말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가? 로티 식으로 말하면 그 해결 방식은 ‘대화를 통한 결속’이다. 그러나 공공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국가가 각종 노동악법과 경찰과 군대까지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것이 현실, 즉 지금은 ‘자본의 전체주의’ 시대이다. 그 전체주의에 대항하기 위하여 우리는 상대주의를 채택한다? “가능한 한 많은 입장을 이해하고 포용하고 감싸는 대화”로 해결하자? 그런데 이 말도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한번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노동자 계급의 무기를 빼앗아버리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이상일 수 없는 것이다.
5. 현실이 없는 사이비 운동권의 자기합리화
지금까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한 사상적 조류를 통하여 이 작가들의 세계인식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직접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작품들 속의 인물들은 두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유형은, 대학 시절에 “나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민을 해 볼 겨를도 없이 변혁운동이란 물살에 휩쓸려들어가” “어느날 갑자기, 내가 아닌 내가 변혁 운동을 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에 깜짝 놀라”(박일문) 운동을 정리하거나 다른 길을 찾는 인물들이다. 다른 유형은, 물론 흔들리고 괴로와하지만 자신의 신념(아니, 차라리 메타포, 환상이라고 말할 테지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전자의 인물들은 정임(이인화), 라라와 나(박일문), 상우(주인석)이고, 규진(이인화), 친구 박(박일문), 영환과 지숙(주인석)이 후자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촛점이 맞춰지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첫번째 유형의 인물들이다.
“이것이 아닌데, 이것이 아닌데, 하며 몇번씩이나 주저앉고, 동지들 앞에서, 후배들 앞에서, 차마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서 혼자서 술을 마시고 흔들리던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부모 형제간의 정을 끊어버리는 동지도 보았다. 6,7년 사귄 애인과 헤어지는 동지도 보았다. 자신은 찬 이슬 걷어차며 감방으로 향하고, 자기 청춘을 바쳐 처절하게 사랑했던 애인은 다른 남자와 웨딩마치를 울리고, 그런데도 갈등이 없었겠는가.”(박일문)라는 운동권의 방황과 고뇌. 그리 새로운 소재도 아니고 우리 곁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사이비 운동권이라고 극단적으로 규정한다. 왜? 그들에겐 현실이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박일문 소설 속의 인물들을 보자. “내 열아홉의 한때는 여자를 낚으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동성로 거리를 쏘다녔다.” “길거리에 토악질을 하고 오줌을 싸고, 염소 산화물과 아황산가스로 가득찬 도시의 허공에 욕질을 하고, 밤이면 밤마다 그 도시의 여자들 사타구니를 흝어내는 무기력한 반항들” “그렇다. 누가 뭐래도 반항이야말로 나의 성실한 삶의 근거였다”고 말하는 ‘나’는 그럼 왜 운동을 시작했는가? 그에게 운동은 모든 사회질서에 “토악질을 하고 오줌을 싸고” “욕질을” 해댈 수 있는 젊은이의 반항적 몸부림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노동해방을 이야기하면서도 노동자의 탄압받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 자처하면서 왜 마르크스-레닌이 옳은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는 파쇼 정권의 악랄한 탄압의 모습도, 그에 대항한 민중의 저항도 구체적으로 그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88년 ‘나’는 출가하게 되지만 그런 ‘나’의 결정에 87년의 항쟁이나 대선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모든 것은 개인적인, “푸른 스물”의 반항적 몸부림으로 귀결된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사회가 아니고 현실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망명의 숲”이라 지칭한 “관념”이다. “관념론과 유물론, 새로운 것과 낡은 것, 본질과 현상, 분석과 종합, 귀납과 연역, 우연성과 필연성, 개별과 보편,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 나는 그 모든 관념 속으로 내 모습을 숨겼다.” 그는 운동권의 논리, 그 관념 속에서만 방황할 뿐이다. 그러한 그가 운동을 계속하는 이유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잡듯이 이것만은 놓쳐선 안돼, 놓쳐선 안돼, 하며 붙잡은 사상을 단 한순간에 팽개친다는 것은 말도 안되”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종교의 도그마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가 될 수 밖에 없”다며 “환상의 순교자”인 운동권으로 남으려고 한다. 그에게 모든 것은 “이 시대의 돈키호테”가 되려는 반항적 몸부림일 따름이다.
그것은 그의 두 여자인 라라와 디디도 마찬가지다. 라라는 ‘나’의 “광기가 좋”았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고 그래서 “당신이 걷는 길을 조금의 회의도 없이 걸”으며 “테러리스트 같은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디디는 “아무하고나 자는 여자”이며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인 동시에 스트립쇼 댄서이기도 하다. 그녀는 또한 광기의 춤을 추며 “엄숙주의와 감정의 폭발 사이를 하루에도 몇차례씩 넘나”드는 “성격의 극단을 치닫고 있는 여자”이다.
사실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은 대표적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로 일컬어지고 있는 장정일의 「아담이 눈 뜰 때」의 등장인물과 비슷하다. 「아담이 눈 뜰 때」에는, 아담이 있고, 그와 성관계를 가지다가 “주체가 없는 이름과 명분만의 가속운동”을 계속하는 운동권이 된 은선이 있고, “순수 고독의 형식”인 섹스를 위해 이남자 저남자를 옮겨다니는 현재가 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는 ‘나’가 있고, 만난지 며칠 만에 “나의 것”이 되어 그를 따르다가 “변혁운동이란 물살에 휩쓸려 들어”간 라라가 있고, “아무나하고 자는” 디디가 있다. (그리고 이인화<본명:류철균>는 「아담이 눈 뜰 때」의 서평에서 이들을 우리 시대 젊은이들의 “전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박일문은, 자본주의와 변혁운동 세력을 동시에 희화화시키는 포스트모더니즘 옹호자인 장정일에 비해 덜 정직하다. 그는 ‘운동’이란 것을 젊음의 광기와 반항을 통해 끊임없이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합리화. 이 세 소설의 작가는 공통적으로, 정권의 억압 못지 않은(!) 운동권 내의 억압과 그에 따른 어쩔 수 없는 방황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죽음’의 모티브를 사용한다. 우리는 관악의 선배인 박혜정 선배를 기억한다. 그녀는 열사라고 불리지만 고결한 투쟁으로서의 분신은 아니었고 정권에 의해 직접적으로 죽음을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 선배는 힘겹게 운동을 하다가 ‘정리’한 후 한강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나는 그 사실이 신문에 1단 기사로 보도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소향(이인화), 라라(박일문), 희정(주인석)의 죽음은 모두 이 박혜정 열사의 죽음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소향과 라라와 희정은 모두 운동권이었고 그 대열에서 이탈한 후 강물에 투신하여 자살하였다. 우리는 솔직히 박혜정 열사의 내적 갈등과 방황을 알 수도 없고 또 멋대로 추측하여 죽음을 욕되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이 작가들은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소향의 죽음에는 아무런 고결한 의미도 없었다. 그것은 좌절이었고 허약이었고 절망, 그리하여 패배해가는 우리 세대 그 자체였다.”(이인화) “이데올로기 과잉, 욕망 과잉 시대의 희생자, 그런 것이었다.”(박일문)
보라, 이 불행한 희생자를! 이 순수하고 섬세한 처녀에게 끊임없이 강요되었던 이데올로기와 욕망을 질타하라! 아니,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충고식으로 하자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위험한 욕망의 놀이를 했던 불행한 세대였다. 너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너희들이 가지고 놀고 있는 ‘진리’들이 실은 ‘환상’임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우리의 역사는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 한 편의 드라마에 불과하다. 너희가 되고자 하는 것은 너희의 욕망의 산물, 이 드라마 속의 가공인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실재하는 너의 자아라고 믿는 위험을 범하지 말라. 그것은 희생과 자멸을 재촉할 따름이다....
그러나 나는(우리는) 그 충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은 맞벌이하는 부모가 나간 사이에 단칸 셋방에서 불에 타죽은 어린 남매의 죽음을 설명할 수 없기에, 유해작업장에서 일하다가 중금속 중독이라는 참혹한 불치의 병에 걸려 죽어간 노동자를 설명할 수 없기에, 지하의 고문실과 또 대로에서 정권에 의해 맞아죽은 젊음을 설명할 수 없기에, 이 모든 죽음들과 ‘현실’을 설명할 수 없기에.
결론적으로 나는 젊음의 반항의 한 양식으로서, 또는 레닌의 이미지를 무분별하게 뒤쫓는 메타포의 놀이로서 운동을 했던 사람이라면 운동을 그만두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것이 필연적일 것이다. 우리가 사회 변혁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 모든 모순들, 이성은 차치하고라도 상식으로도 납득되지 않는 현실의 불합리를 알고 또 분노하기 때문인 것이다. 정말 건방진 말이지만, 이 선배들에게 나는 오히려 충고하고 싶다. 운동을 그만두어도 좋으니 제발 합리화는 하지 말아달라고. 별로 보기 좋은 선배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관념 속으로의 망명이 아니라 결코 버리고 떠나올 수 없는 짙푸른 현실의 대지에 두 발을 굳게 디디고 서는 것일 터이므로.
6. 그들이 가는 길, 우리가 가야 하는 길
어쨌든 대충은 끝난 것 같다. 그런데 사족같이 6장을 덧붙이는 것은, 힘들게 운동한 세대, 그 선배들의 고충을 이해해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들이 이제 가야 할 길을 최근 발표된 한 신예작가의 작품을 통하여 바라보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야기할 작품은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과 비슷한 소재와 인물 설정을 가지고 전혀 다른 결론을 이끌어낸 이남희의 장편소설 「산 위에서 겨울을 나다」(문예중앙 여름호)이다.
먼저 주인석의 작품 내용을 살펴보자. 주인공은 상우이다. 대학생 때 운동을 하다가 잡혀들어가 고문에 못이겨 동지를 배신하였고 운동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 “마르크시즘은 인민의 아편이예요.”라고 말하는 윤주를 만나 사랑을 하고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는 댓가로서 그녀의 아버지의 빽으로 방송국에 입사했다. 방송민주화투쟁이 일어나지만 선배의 권유에도 끝까지 가담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상우가 옛 동지인 지숙의 전화를 받는 데에서 시작한다. 지숙은 상우가 학창 시절에 좋아했던 여자이지만 그의 배신의 결과로 잡혀들어가고 감옥에서 나온 후 조직에서 탁월했던 영환과 결혼하여 공장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지숙이 전화한 것은 영환의 죽음 때문이었다. 쫓기고 있었던 영환은 철로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규명되지 않는다. 지숙의 부탁으로 영환의 시체가 누워있는 영안실과 장례식까지 따라간 상우는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그리고 장자의 한구절을 들고 서울을 떠난다.
이남희의 소설에서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잠시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현재 노래방 설비체인을 하는 회사에 다니며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홍서가 주인공이다. 동문회에서 만난 선배의 권유로 인정상 그 선배가 일하는 인권협회의 일을 잠깐 도와주게 된다. 거기서 옛 동지들, 특히 예전에 삼각관계였던 선영과 병욱을 만나고 선영으로부터는 다시 ‘일’을 같이 하자는 권유를 받기도 하지만 거절한다. 그러다 중학교 동창이기도 하고 인권협회에서 일하는 친구 재열의 죽음이 닥쳐온다. 역시 자살인지 타살인지 규명되지 않는다. 홍서는 그 죽음의 의미를 밝히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둔 후 다시 현실의 不正을 변혁하기 위한 일에 동참하기로 한다.
비슷한 인물설정, 즉, 학생시절의 운동을 정리하고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상우와 홍서), 그 주인공과 삼각관계였으며 계속 운동의 길을 걷는 한 쌍의 남녀(영환과 지숙, 병욱과 선영)가 있다. 또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죽음이 있다.
상우와 홍서는 운동을 정리하고 “오늘이 어제와 같고 내일이 오늘과 같으리라고 짐작되는 생활이란 생각보다 훨씬 덜 따분한 것이었다. 그는 되도록이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제 무엇이든지 깊이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짓이었다. 그저 살면 된다.”(이남희)라고 말하는 직장인이다. 상우는 방송국 노조에 가입하라는 이선배의 권유룰 거절하고 홍서는 다시 같이 일을 해보자는 선영의 권유를 거절한다. 심지어 쫓기는 지숙을 상우가 그의 아파트에서 재워주고 역시 쫓기는 선영을 홍서가 그의 아파트에서 재워주며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도 비슷하다.
그러나 친구의 의문사를 두고 상우와 홍서의 대응양식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 의문사는 둘다 규명되지는 않지만 타살이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러나 홍서가 “널 이대로 어둠 속에 묻을 수눈 없어.”라며 그 죽음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반면 상우는 어떻게든지 영환의 죽음이 자살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한다. “상우의 생각으로도 영환같이 신념이 강하고 낙관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자살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알겠는가? 죽어가는 순간의 심리란 도저히 알 방도가 없지 않은가.... 영환은 자살했을 수도 있다. 종연과 이야기했을 때는 차마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상우는 영환이 자살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랬다면 영환은 엄청난 절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었다.”(주인석) 상우는 자신의 방황과 절망을 영환의 죽음에 투영시켜 해석하고 싶어한다. 억지로라도 자살임을 믿고 싶어한다.
또한 결말 부분 주인공의 결단의 방법도 다르다. 둘다 직장을 그만두지만, 상우는 ‘쓸모없는 나무야말로 천명을 다한다’는 장자의 한 대목을 가지고 “지숙도, 아니 영환도 장자를 읽었어야 했다....그랬다면 그들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그토록 지난한 삶을 영문모르고 살아내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그리고 적어도 영환이 그렇게 빨리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난다. 홍서는 직장을 그만둔 다음 무엇을 할 것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일을 해야지..... 민병욱이 하던 일을 내가 맡아서 마무리지을 생각이야.”
무엇이 이들이 가는 길을 이렇게 다르게 했을까?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이다. 상우에게 있어서 역사, 사회, 현실은 끊임없는 연극이고 드라마이다. 심지어 고문을 받는 절박한 순간에도 그는 그 상황을 한편의 연극적 구조로 설명하려 한다. 그에게 사실 현실이란 없다. 단지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 연극이 있을 따름이다. 「산 위에서 겨울을 나다」의 주인공 홍서에게 하나의 계기가 된 91년 5월의 투쟁조차도, 상우에게는 극적 요소를 고루 갖춘 쓸만한 희극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상우는 떠난다. 「장자」를 들고. “영문 모르고 살아” 온 지숙과 영환의 삶을 애석해하면서. 새로운 연극의 서막이다. 이 다음의 연극은 무엇이 될 것인가?
나는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선배들이 가는 길이 어디인지 알고 싶었다. 주인석의 ‘상우’는 장자를 들고 떠나고, 이인화의 ‘은우’는 다 찌그러진 차 밖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들이 가는 길은 어디인가? “나에게 더이상 실재이니, 도덕이니, 완전성이니 그 따위를 강요하지 말라. 나는 그저 묵은 사랑과 경탄이라는 해묵은 본능을 가지고 산산이 찢겨진 가치의 왕국을 헤맬 것이다.”(이인화)고 선언한 그들이 가는 길 - “황막하고 낯선” 환상의 광야?
그들은 언제쯤 지상으로 돌아올 것인가? 이 질문을 선배들에게 던지기 앞서 우리는 우리에게 스스로 질문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상에서 십 센티미터쯤 떨어져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이남희) 것은 아닌가?
이 선배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안온한 캠퍼스의 울타리 안에서 수많은 작가와 사상가와 연극과 희곡을 나열하는 그 풍성한 관념의 숲으로 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지의 땀과 숨결을 느끼고 숨쉬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 터이다. “지구란 행성은 사랑할 만한 행성이 못된다. 대단히 불쾌한 곳이다.”라고 박일문은 말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이라는 대지는 땀냄새나고 천박하고 비이성적이고 제멋대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중력 상태에서 살 수 없는 우리가 결코 버리고 떠나올 수 없는 땅이기도 하다. 관념의 허공으로 발돋음하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비틀거리며 “세상은 이처럼 불안하고 혼돈되고 환상일 따름이다!”고 외치는 것보다는 굳건한 두 개의 발로 현실의 대지에 당당히 서는 편이 훨씬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