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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0. Lavapies

야우리 2019. 2. 1. 09:19

마드리드 구시가는 고풍스런 도시다. 닳아버린 나무계단과 삐걱거리는 문들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물론 엄청나게 많은 개들과 그들의 배설물도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굉장히 정치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거리마다 공산당 분파, 포데모스, 아나키스트, 파시스트 등의 정치적 구호와 선전물들이 붙어 있었다. 임시 숙소의 맞은편은 철거 투쟁중인 건물이었다. 광란의 파티 흔적이 남아 있어 카페 마리 생각이 났다. 자기 전 오늘은, 도시 산책자 노릇을 하다 만난 한 노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전승기를 문 앞에 걸어 놓은 집에 사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다. 
간만에 보는 적기를 눈 앞에 두고 사진을 찍고 있으니 한 노인이 내게 들어오라고 했다. 문간에 '박물관'이라 적어 놓았기에 스스럼없이 들어가서 인사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이곳은 박물관인가요?"
공식적인 박물관은 아니고 개인 집이지만 사무실로 같이 쓰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시나브리오 끼하노, 72세로, 일종의 서점에 책을 소개하는 일 비슷한 것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안쪽 소파에는 또 다른 백발의 노인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계속 공산당과 사회당의 분파 투쟁과 논쟁에 대한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저는 한국에서 온 학생입니다. 이건 소비에트 깃발이네요."
"맞아. 2차대전때 베를린에 깃발을 올린 부대의 것이지. 나는 맑스-레닌주의자야. 여기 레닌 동지 사진도 있잖나. 역사에 관심이 있나? 책 볼래?"
서재에는 여러가지 도록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과 각종 철학서들이 꽂혀 있었다. 그는 프랑코 시절 군사독재에 대한 회화들을 모아 놓은 도록을 보여주며 자신을 반파시즘 문화운동가라고 상술했다.
"저는 공산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마드리드에는 스페인 내전 관련한 기념관이 있나요?"
"아 동지(까마라다)로군. 마드리드에는 그런 기념관은 없어. 하지만 국제여단 기념비가 마드리드 국립대에 있지. 자세한 위치를 알려줄게."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서점 홍보물 뒤에 자세한 위치를 적어준 노인은 내 이메일 주소를 받아가더니 자신이 만든 굿즈들을 쥐어주고 갑자기 식사를 청했다. 식탁 위에는 각종 말린 과일들과 과자들이 있었다. 과자는 그가 직접 구운 것이라 했다. 아주 달았다. 개 두 마리가 부엌을 서성이고 있었고, '노동자 공화국' 등의 구호가 적힌 부엌에서 그는 요리를 시작했다. "스페인은 왕국이 아니야. 공화국이지."



갖가지 살라미들을 썰어주며 그의 질문 공세가 시작됐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 긍정적인가?"
"통일이 가능하다면, 그에 대해 미국이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등 등, 썰어놓은 살라미들을 가끔씩 개들에게 던져 주기도 하고 내게 권하기도 하면서 나의 짧은 서어 실력이 절망스러울 만큼 한국과 국제 정세에 대한 각종 질문들이 이어졌다. 한달 반 동안 이곳에서 공부를 한다고 하니 자신이 관여하는 서점 행사에 와보라는 제안도 있었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지.



"와인 마실 텐가?"
대답과 동시에 그는 에티켓 없는 포도주 병을 꺼내더니 라벨을 붙이고는 설명했다. 함께 일하는 친구 양조장에서 나온 포도주를 직접 브랜딩하여 서점에서 판매한다고 했다. 산미가 튀지 않고 타닌이 부드러운 전형적인 스페인 리오하 템프라니요 와인으로, 데일리로 마시기 적합한 맛이었다. 한 병에 8유로에 팔고 있다고 한다. 하몽, 초리조, 살지촌... 갖가지 살라미와 올리브들... 
"살루드!"

"근처에 포데모스 사무실이 있는데, 포데모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는 크게 웃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포데모스는 공산주의자들이 아니야. 그들은 사민주의자들이지. 사회-파시스트!"
"아 당신은 스탈린주의자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는 스페인에 너무 많은 공산주의 정파들이 있어서 그들의 통일은 요원하다고 했다. 어디서나 운동권들은 타 정파 욕하면서 '좌익의 통일' 말하는 건 똑같군.
주는 대로 먹다 보니 배가 불렀다. 갈 시간이다.

"선생님(세뇨르), 친구들이 공항으로 온다고 해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세뇨르? 아니야. 까마라다(동지), 끼하노 동지라고 불러. 이메일로 행사 초대장 보내줄게."
"또 봐요."

메일함을 열어보니 어느 새 그의 출판기념회 초대장이 와 있었다.

특별 출판 기념회 1월 20일 14시
'제국의 심장부를 공격하다'
'끼하노의 헛소리'
주최: 공산주의 이니셔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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