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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딱의 활동과 그 한계

야우리 2013. 9. 25. 19:19

ATTAC(Association for the Taxation of financial Transactions and Aid to Citizens금융거래과세와시민지원을위한연합) 의 활동과 그 한계


권용석


    금융거래과세와시민지원을위한연합(이하 ‘아딱’ 이라 한다) 1998년 프랑스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의 ‘시장을 무장해제하라’ 라는 기사로부터 자극을 받은 지식인들의 행동 지향적인 대중적 시민교육운동으로 출발하였다. 그 사회적 배경에는 1995년 주뻬 총리가 주도했던 신자유주의적 사회보장제도개약에 맞서 시민대중이 벌인 공공부문 대투쟁이 있었다. 파업은 주뻬 총리를 굴복시켰고, 그동안 공산당과 노동조합의 구태의연한 선전선동에 질려 있었던 시민대중들이 이후 프랑스 사회운동의 핵심 투쟁 세력이자 동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95년 공공부문 대투쟁 이후 프랑스 시민사회는 다자간투자협정(MAI –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의 간섭과 규제에 구속받지 않는 투자 규정) 이라는 악() 을 만나게 된다. 빠리의 오르셰 미술관 근처에 있는 OECD 상임사무국에서 한 여성운동가에 의해 유출된 이 문서는 프랑스 시민사회를 들끓게 만들었고, 그들은 다시 한 번 투쟁에 나서 정부를 굴복시켰다. ‘시장을 무장해제하라’ 는 기사가 발표된 시점 또한 이 때였고, 기사에서 이냐시오 라모네는 당시 동아시아에 몰아치던 경제위기의 폭풍을 언급하며 금융자본의 세계화에 맞서 토빈세[각주:1] 를 전면에 내건 NGO(시민사회단체) 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1998316일 르 몽드 디쁠로마띠끄 사무실에 모인 아딱 프랑스 창립자들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대한 관점을 정리하고 이에 대한 투쟁을 위해 전략과 목표들을 도출했다.


1)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대한 저항과 신뢰할 수 있는 대안 제시에 대한 필요
2)
금융거래과세를 통해 증가하는 경제 불안정성과 사회 불평등성을 저지할 필요
3)
금융세계화의 부정적 효과에 저항하기 위해 프랑스와 세계에 만연한 전통적 간극을 뛰어넘고 정치에 대한 참여를 독려해야 할 긴급한 필요


    이후 아딱 프랑스는 68혁명 이후 나타난 신사회운동의 대표적 형태로 조명받으며 세계사회포럼, 유럽헌법 반대운동 등 대안세계화운동의 전면에서 활동했다.[각주:2] 그러나 2001G8 정상회담 반대 시위에서 그 전성기를 구가한 아딱은 9.11 테러 이후 줄곧 하향세를 걷고 있다. 이것은 아딱이 중심이 되어 건설한 WSF(세계사회포럼) 도 마찬가지이다. 2006년에는 의장 선거 과정에서 비민주적인 일[각주:3]이 일어나 재선거를 치루는 사태도 있었다. 대표적인 자율주의 경향의 조직으로 느슨한 형태의 합의적 민주주의 네트워크 조직인 아딱 프랑스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리고 아딱 프랑스의 활동이 2008년 세계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지지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그것의 비정치적 경향을 들 수 있겠다. 일단, 아딱과 세계사회포럼 모두 정당의 가입과 참가를 불허한다. 대안세계화 운동이 각 국가 내에서 좌파정당들과 결합하여 실천하는 것은 운동이 확대될수록 불가피한 일이다. 아래로부터의 운동(대중운동) 또한 매우 중요하지만, 2008년 촛불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이 ‘정치’ 와 거리를 두려 했을 때 그것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즉 권력쟁취 없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아딱과 세계사회포럼 내부의 주도적 자율주의자들은 지속적으로 정당과 거리를 두려 하였고, 이는 운동 내부의 분절과 혼란을 불러왔다. 이에 대해 정성진(2008) 은 자율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절연과 당 건설, 대중운동 강화를 통한 공동전선의 형성을 제안한다.


    둘째로 그것의 조직운영과 의사결정 방식에 관련된 문제들이 있다. 아딱 프랑스의 조직 구성은 <그림 1>(김의동, 2009 에서 재인용) 과 같다. 아딱은 여타 자율주의적 행동조직들과 같이 대의제가 아닌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되며, 총회가 이사회를 선출하고, 이사회가 다른 실무들을 맏는다. 겉으로 보면 매우 민주적이지만, 이러한 의사결정 구조는 매우 큰 기회비용을 요구한다. 비공식적 엘리트에 의한 ‘무구조의 독재’(Tyranny of structurelessness) 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딱의 조직 구성에서도 드러나는데, 아딱의 정관 7조 이사회 관련 규정을 보면 이사회는 모든 의사결정과 정책입법의 권한을 부여받으며, 30명의 이사진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사진의 3/5을 차지하는18명이 창립자 모임에 의해 선출되며, 이사회 의장도 창립자 가운데 한 명을 이사회에서 다수결로 임명하도록 되어 있어 창립자 모임의 의사가 거의 전적으로 이사회에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창립자 모임의 성원을 교체하기 위해서는 창립자 모임 전체 인원 가운데 2/3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것으로 정관 11조에 규정하고 있어 실제로도 거의 교체된 사례가 없다. 민주적으로 보이는 조직 구성이지만 사실상 ‘원로원’ 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2003~06년 당시 반전운동의 물결이 세계를 휩쓸었을 당시 창립자 모임의 구성원들이 반전운동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그것이 아딱의 활동에 그대로 반영되어 아딱을 매우 우경화시킨 것은 이러한 조직 구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의도적 비정치성, 그러나 너무나도 정치적인 그들의 활동양식 또한 아딱을 약화시키고 있다. 애초에 2005년의 유럽헌법 반대 시위의 승리나 2000년대 세계사회포럼의 건설도 정치정당의 협력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토빈세’ 의 모순이 있다. 토빈세에 반대하는 논자들은 다양한 근거로 그것을 반대한다.(자세한 것은 김의동, 2007 참조) 대표적으로 정성진(2006: 119-119) 은 토빈세 부과 주장은 그 정책이 국제적 공조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 그렇지 않으면 특정 국가는 대규모 금융기관의 보이콧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 비현실적 조건과 함께 자본의 단기이동 규제의 한계를 지적한다. 토빈세가 자본이동에 대한 제한으로 작용할 수 있으려면 투기자본이 기대하는 이익이 토빈세 보다 작아야 하는데, 0.05%에서 0.1%의 토빈세율로는 투기자본 이동을 막을 수 없다고 비판한다.

    또한 Oxley(2001)는 토빈세를 통한 조세수입이 제3세계에 대한 원조 뿐 만 아니라 다양한 목적에 유익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어느 나라도 어떠한 이권의 댓가 없이 빈국에 원조를 제공한 바는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토빈세 수입을 누가 관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데, IMF, 더 나아가 UN이 그것을 관리한다고 해도 이들 기구가 강대국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시장의 측면이나 이권 확보의 측면에서 강대국들이 활용할 수 있는 수단만 하나 더 늘려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과연 어느 기구가 감히 반미 국가(eg. 북한, 쿠바 등...)들이 경제적 빈곤국임에도 불구하고 지원할 수 있을 것인가?

    토빈세가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에 의해 제안된 지도 40년이 넘게 흘렀고, 아딱이 처음 토빈세 주장을 대중적으로 알린 것도 14년이 흘렀다. 그 동안 토빈세는 실제로 도입된 경우도 있고, G20이나 유럽의회 등 신자유주의적 금융자본의 첨병들이라고 할 수 있는 기관들에서 조차 언급된다. 이것은 아딱의 창립자 베르나르 까상 또한 공감하고 있다.(정종권, 2012) 위와 같은 이유로 토빈세를 과연 진보적 조치로 간주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아딱 프랑스의 규모는 2004년 약 3만에 달하였다. 현재는 150개 지역지부에 15천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지금까지 아딱의 활동을 특히 프랑스 아딱의 활동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아딱은 21세기 신사회운동의 대표적인 형태로, 대안세계화운동의 선두주자로 의미있는 활동을 해 왔으나 그것의 조직운영과 의제설정에 관련해서 창립자 모임의 독재를 용인했고, 대중운동을 위의 정치운동과 긴밀히 결합시키는 데 실패했다. (아딱 지도부들의 생각인)국가의 사멸이 환상이라면, 문제가 되는 지배권력에 대항하는 대항권력을 창출하고 확장하여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아래부터의 대중정치의 활성화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자본주의적 경제 형태를 노동자 통제 경제로 변화시킴과 아울러 권위주의적 국가형태를 다원적 민주주의 국가형태로 변화시키는 3중의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심광현, 2008)



참고문헌


김의동, 2007, “국제금융투기와 토빈세.” 국제지역연구 제 111.

김의동, 2009, “대안세계화 운동에서의 Attac의 성과와 한계.” 사회과학연구 제     172.

송종운, 2007, “아딱 프랑스를 향한 하나의 시선.” 월간 사회운동. http://www.movements.or.kr/bbs/view.php?board=journal&id=1714

심광현, 2008. “68혁명의 문화정치적 모순과 이행의 문제.”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마르크스주의 연 구 제 5권 제 2

정성진, 2006, “케인스주의인가, 21세기 사회주의인가?”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마르크스주의 연구 3권 제 1

정성진, 2008,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반자본주의 이론과 전략.” 

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마르크스주의 연구 제 5권 제 2

정종권, 2012, “저항의 인터내셔널, 진척될 것 – 아탁(ATTAC) 까센 초대 대표     인터뷰.” 레디앙.

http://www.redian.org/archive/42176


Calinicos, Alex and Chris Nineham, 2007, “At an impasse?     

Anti-capitalism and the social forums today”, International Socialism 115, July

Oxley, Greg, 2001, “The “Tobin Tax” and Protectionism: the Bankrupt     Policies of Attac”, La Riposte, 4/18


www.attac.org

www.france.attac.org




  1. 198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임스 토빈이 1972년에 제안한 금융자본에 대한 과세 정책으로, 전 세계 모든 외환 거래에 소량의 세금을 부과하여 금융 시장을 안정화시키고 그 재원을 국제사회를 위해 사용하자는 것이다. [본문으로]
  2. 아딱의 활동 역사에 관해서는 <표 1>(김의동, 2009 에서 재인용) 을 보시오. [본문으로]
  3. 아딱의 초대 의장 베르나르 까쌍의 후계자 자끄 니코노프 의장의 세습 시도가 있었고, 그것에 실패하자 그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들은 ‘아딱의 미래’ 라는 사조직을 결성해 활동한 사실이 있다.(Calinicos and Nineham, 200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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