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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림다방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세간에 천재라 회자되는 문학가 전혜린은 1965년 1월 10일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공식 발표된 사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이었다. 유서는 남기지 않았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라는 말도 있고, 수유리 고갯길에서 눈에 덮힌 시신으로 발견되었다는 말도 있다. 추측하건대 그녀가 처방받던 세코날은 대표적인 바르비탈산 계열 수면제로 요즘 주로 쓰이는 벤조디아제핀 계열에 비해 치사량이 현저히 낮은데다가, 전날 술에 취한 채로 다량을 처방받아 복용했다는 정황이 있으니 자살 여부를 떠나 수면제가 사망의 원인이 되었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녀는 죽기 전 날 대학로 학림다방의 입구 오른쪽 창가 자리에 앉아 한참을 기다리다 우연히 후배를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는 곧 탤런트 최불암씨의 모친이 운영하던 명동의 술집 '은성' 으로 함께 자리를 옮겼다. 그 자리에 앉아 무엇을 생각했을까. 실패로 끝난 결혼 생활, 마찬가지로 실패했던 띠동갑 제자와의 연애, 죽는 날 까지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던 그러나 평생 쓰고 싶어했던 소설... 며칠 전 문득 전혜린 생각이 나서 그녀의 자리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대학로 학림다방을 찾았다.


 마지막 방문으로부터 계절이 한 바퀴 돌았다. 학림도 많이 바뀌었다. 더 이상 흡연은 불가능했고 모 드라마의 영향으로 중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코스가 되어 있었다. 커피 맛도 대세인 에스프레소 배리에이션에 적합하게 조금 쓰게 바뀌었다. 시대에 맞춰 변한 덕에 장사는 훨씬 잘 되는 것 같았다. 그런 변화를 나같은 사람은 달가워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전통을 지키는 대신 망해버리라고 강요할 수는 없잖은가. 머리를 붉게 물들인 파트타임 점원이 주문을 받았다. 


 전혜린이 앉았던 그 곳에 앉으려고 보니 넓은 4인석을 한 여성 혼자 쓰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합석을 청해 보았다.


 "흠, 흠. 죄송한데, 여기 앉아도 될까요?"
 "네 앉으세요!"


 의외로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긴 생머리의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테이블에 맥북 에어 13인치와 구스타프 클림트에 대한 영문 소설을 올려놓고 비엔나 커피(아인슈패너!) 를 마시고 있었다. 말 없이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창 밖을 물끄러미 내다보는 그녀가 범상치 않아 넌지시 말을 걸었다.


 "혹시 이 자리에 얽힌 이야기를 아세요?"
 "이야기요? 그건 모르지만 이 자리 왠지 인기가 많은 것 같아요."
 "이 자리가 전혜린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앉았던 자리거든요."
 "전혜린... 수필가 말이죠?"


 운을 띄우니 그녀가 스마트폰으로 관련 자료를 찾아서 같이 보기도 하고 해서 어느정도 대화가 통함을 알 수 있었다. 혼자서 4인석 차지하고 앉는 것이 민망하던 참이었는데 합석을 청해주어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했다. 가까이서 보니 동그란 얼굴에 웃을 때 지는 눈가 주름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자신을 근처 사는 직장인이고 십수년 전에 대학을 다녔다고 소개하는 걸로 봐서 첫인상과는 달리 30대쯤 되었을 것이다. 
 술을 좋아하느냐고, 근처에 괜찮은 데 없느냐고 묻자 그녀가 '독일주택' 이라는 괜찮은 술집이 있다고 했다. 그곳의 이름이 누구나 추측할 수 있는 독일 맥주를 파는 독일주택이 아니라 '홀로 한 잔의 술을 마시는 집' 이라는 뜻의 독일주택임을 말했을때 나는 정말 그곳에 가 보고 싶었다. (사실 조만간 가볼 예정이다.)


커피 리필을 해 가며 환담을 나누다가 나는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곧 자리를 떠야 했다. 


 "제가 지방 내려갈 일이 있어서 이젠 가봐야 겠네요."
 "가시게요...? 우리 앞으로 우연히 또 만나게 될까요? 학림에 올 때마다 이 자리 살펴볼게요.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네요."


 나가면서 커피 값을 그녀가 마신 것 까지 한데 치르고 영수증을 그녀에게 건넸다. 합석을 허락해주고 좋은 시간을 보내게 해 줘서 감사하다는 의미였다.


 "제가 커피값을 다 냈으니 그냥 가시면 됩니다. 영수증은 여기..."
 그녀가 활짝 웃었다. 계단을 내려가기 전 돌아보니 그때까지도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웃음짓는 눈길이 따뜻했다.


 누군가는 이걸 읽고 '영수증에 명함이라도 겹쳐서 줄 것이지 이 자 완전히 바보로군!' 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허나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이 언제나 아름답듯이 이 만남도 그러하기를 바랄 뿐이다. 혹시 모른다. 언젠가 학림에 들어서면 그 때 그 자리에 앉아있는 그녀가 보일지도. 이후의 일은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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