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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chinahumanitas.net/?bwl_kb=노라는-떠난-후-어떻게-되었는가


1923년 12월 26일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 문예회에서의 강연(娜拉走后怎样——一九二三年十二月二十六日在北京女子高等师范学校文艺会讲)


我今天要讲的是“娜拉走后怎样?”
제가 오늘 이야기하려는 것은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입니다.

易卜生〔2〕是十九世纪后半的瑙威〔3〕的一个文人。他的著作,除了几十首诗之外,其余都是剧本。
입센은 19세기 후반 노르웨이의 한 문인입니다. 그의 저작은 시 몇 십 수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극본입니다. 
这些剧本里面,有一时期是大抵含有社会问题的,世间也称作“社会剧”,其中有一篇就是《娜拉》。
이들 극본 속에는 어느 한 시기에 대체로 사회문제들이 담겨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사회극’이라고도 부르고, 그 가운데 한 편이 바로 《노라》입니다.
《娜拉》一名Ein Puppenheim,中国译作《傀儡家庭》(即玩偶之家)。但Puppe不单是牵线的傀儡,孩子抱着玩的人形〔4〕也是;引申开去,别人怎么指挥,他便怎么做的人也是。娜拉当初是满足地生活在所谓幸福的家庭里的,但是她竟觉悟了:自己是丈夫的傀儡,孩子们又是她的傀儡。她于是走了,只听得关门声,接着就是闭幕。这想来大家都知道,不必细说了。

『노라』는 일명 Ein Puppenheim이라고 하며, 중국에서는 인형의 집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Puppe는 끈으로 조종하는 꼭두각시일 뿐 아니라 아이들이 안고 노는 인형이기도 합니다. 원의 가 확대되어 남이 시키는 대로 그대로 따라 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노라는 처음에는 이른바 행복한 가정에서 만족스럽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자기는 남편의 인형이라고 아이들은 또 자기의 인형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그리하여 떠나게 되었고, 다만 문닫는 소리와 함께 곧 막이 내려집니다. 생각해 보니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라 자세히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娜拉要怎样才不走呢?
노라는 어떻게 해야 떠나지 않을까요? 
或者说易卜生自己有解答,就是Die Frau vom Meer,《海的夫人》的。
혹자는 입센 자신이 해답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Die Frau vom Meer, 즉 《바다의 여인》이라고 말합니다.
这女人是已经结婚的了,然而先前有一个爱人在海的彼岸,一日突然寻来,叫她一同去。
이 여인은 이미 결혼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전에 애인이었던 사람이 바다 저쪽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쑥 찾아와 그녀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합니다. 
她便告知她的丈夫,要和那外来人会面。
그녀는 곧 자기 남편에게 그 사람을 만나 보겠다고 말했습니다. 
临末,她的丈夫说,“现在放你完全自由。(走与不走)你能够自己选择,并且还要自己负责任。”
이윽고 그녀의 남편이 “이제 당신을 완전히 자유롭게 놓아 주겠소. (떠나든 떠나지 않든)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오”라고 말했습니다. 
于是什么事全都改变,她就不走了。
그러자 사태는 완전히 바뀌었고, 그녀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这样看来,娜拉倘也得到这样的自由,或者也便可以安住。
그러고 보면 노라도 만일 이러한 자유를 얻었다면 아마도 안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但娜拉毕竟是走了的。
그러나 노라는 결국 떠났습니다.
走了以后怎样? 
떠난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易卜生并无解答;而且他已经死了。
입센은 결코 해답을 주지 않았고, 게다가 그는 이미 죽었습니다. 
即使不死,他也不负解答的责任。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는 해답을 줄 책임도 지지 않을 것입니다. 
因为易卜生是在做诗,不是为社会提出问题来而且代为解答。
입센은 시를 짓고 있었지, 사회를 위해 문제를 제기하고 대신해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就如黄莺一样,因为他自己要歌唱,所以他歌唱,不是要唱给人们听得有趣,有益。 
바로 꾀꼬리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꾀꼬리는 스스로 노래를 부르고 싶어야 노래를 부르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재미있고 유익한 노래를 들려주려고 부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易卜生是很不通世故的,相传在许多妇女们一同招待他的筵宴上,代表者起来致谢他作了《傀儡家庭》,将女性的自觉,解放这些事,给人心以新的启示的时候,他却答道,“我写那篇却并不是这意思,我不过是做诗。”
입센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많은 부녀자들이 함께 그를 초대한 연회석에서 대표자가 일어나서 그가 《인형의 집》을 지어서 여성을 자각시키고 이러한 일에서 해방시킴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계시를 주었다고 감사를 표시했을 때, 그는 오히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그 작품을 쓴 것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시를 지었을 뿐입니다.”
娜拉走后怎样?
노라가 떠난 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别人可是也发表过意见的。
다른 사람도 이 문제에 대해 역시 의견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一个英国人曾作一篇戏剧,说一个新式的女子走出家庭,再也没有路走,终于堕落,进了妓院了。
어떤 영국 사람은 희곡을 한 편 지어 한 신식여자가 집을 나왔으나 더 이상 갈 길도 없자 마침내 타락하여 기생집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还有一个中国人,——我称他什么呢?上海的文学家罢,——说他所见的《娜拉》是和现译本不同,娜拉终于回来了。
또 어떤 중국 사람이, 제가 그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상하이의 문학가라고 합시다. 그가 자신이 본 《노라》는 지금의 번역본과는 다르며, 노라는 결국 되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这样的本子可惜没有第二人看见,除非是易卜生自己寄给他的。
이러한 판본은 안타깝게도 두 번째로 본 사람이 없으니 입센 자신이 직접 그에게 부쳐 준 것인지도 모르죠. 
但从事理上推想起来,娜拉或者也实在只有两条路:不是堕落,就是回来。
그런데 일의 정황에 따라 추론해 보면, 노라는 아마 실제로 두 가지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면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因为如果是一匹小鸟,则笼子里固然不自由,而一出笼门,外面便又有鹰,有猫,以及别的什么东西之类;倘使已经关得麻痹了翅子,忘却了飞翔,也诚然是无路可以走。
만약 작은 새 한 마리가 새장 속에서는 물론 자유롭지 못하지만 새장 문을 나와도 바깥에는 매가 있고, 고양이가 있고, 또한 다른 무엇들이 있고, 만일 갇혀 있어서 이미 날개가 마비되었고 나는 법마저 잊어버렸다면 확실히 갈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还有一条,就是饿死了,但饿死已经离开了生活,更无所谓问题,所以也不是什么路。
또 하나의 길이 있는데, 바로 굶어죽는 것입니다. 그러나 굶어죽는 것은 이미 삶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더 없으니 아무 길도 아닙니다.
人生最苦痛的是梦醒了无路可以走。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做梦的人是幸福的;倘没有看出可走的路,最要紧的是不要去惊醒他。
꿈을 꾸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만일 갈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놀래 깨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你看,唐朝的诗人李贺〔5〕,不是困顿了一世的么?
아시다시피 당나라 때의 시인 이하는 한평생 고달프지 않았습니까? 
而他临死的时候,却对他的母亲说,“阿妈,上帝造成了白玉楼,叫我做文章落成去了。”
그런데 그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자기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하느님이 백옥루를 지어 놓고 저에게 낙성식을 위한 글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这岂非明明是一个诳,一个梦?
이 어찌 그야말로 거짓부렁이 아니며 꿈이 아니겠습니까?
然而一个小的和一个老的,一个死的和一个活的,死的高兴地死去,活的放心地活着。
그렇지만 한 젊은이와 한 늙은이,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살 것이요, 죽은 사람이 기쁘게 죽어야, 살아 있는 사람이 마음 놓고 살아갈 것입니다. 
说诳和做梦,在这些时候便见得伟大。
거짓부렁을 떨고 꿈을 꾸는 일은 이러한 때에 위대해 보입니다. 
所以我想,假使寻不出路,我们所要的倒是梦。
그래서 저는 만일 나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도리어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但是,万不可做将来的梦。
그러나 절대로 장래의 꿈을 꾸어서는 안 됩니다. 
阿尔志跋绥夫〔6〕曾经借了他所做的小说,质问过梦想将来的黄金世界的理想家,因为要造那世界,先唤起许多人们来受苦。
아르치바셰프는 자신이 지은 소설을 빌려 장래의 황금세계를 몽상하는 이상가를 힐문 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세계를 만들려면 먼저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일으켜 고통을 받도록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他说,“你们将黄金世界预约给他们的子孙了,可是有什么给他们自己呢?”
그는, “여러분들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황금세계를 예약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에게 줄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하고 말했습니다.
有是有的,就是将来的希望。
있기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장래의 희망입니다. 
但代价也太大了,为了这希望,要使人练敏了感觉来更深切地感到自己的苦痛,叫起灵魂来目睹他自己的腐烂的尸骸。
그러나 대가가 너무 큽니다. 이 희망을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하여 더욱 절실하게 자신의 고통을 느끼도록 해서 영혼을 불러일으켜 자신의 썩은 시체를 보도록 헤야 합니다.
惟有说诳和做梦,这些时候便见得伟大。
거짓부렁을 하고 꿈을 꾸는 일은 오직 이러한 때에 위대해 보입니다. 
所以我想,假使寻不出路,我们所要的就是梦;但不要将来的梦,只要目前的梦。
그래서 저는 만일 나갈 길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꿈이기는 하지만 장래의 꿈이 아니라 단지 지금의 꿈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然而娜拉既然醒了,是很不容易回到梦境的,因此只得走;可是走了以后,有时却也免不掉堕落或回来。
그렇지만 노라는 이미 깨어났으니 꿈의 세계로 되돌아오기란 그리 쉽지 않으니, 이로 인해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떠난 뒤에 때로는 타락하거나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否则,就得问:她除了觉醒的心以外,还带了什么去?
그렇지 않으면 곧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그녀는 각성한 마음 이외에 또 무엇을 갖고 떠났는가? 
倘只有一条像诸君一样的紫红的绒绳的围巾,那可是无论宽到二尺或三尺,也完全是不中用。
만일 제군들처럼 검붉은 털목도리만을 갖고 떠났다면 그야 너비가 두 자든 세 자든 관계없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她还须更富有,提包里有准备,直白地说,就是要有钱。
그녀가 더 부유해야, 손가방 안에 준비가 있어야 하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梦是好的;否则,钱是要紧的。
꿈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돈이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钱这个字很难听,或者要被高尚的君子们所非笑,但我总觉得人们的议论是不但昨天和今天,即使饭前和饭后,也往往有些差别。
돈이라는 말이 아주 귀에 거슬립니다. 고상한 군자들에게 비웃음을 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어쩐지 사람들의 시빗거리는 어제도 오늘도 설령 밥 먹기 전과 뒤라 할지라도 종종 차이가 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凡承认饭需钱买,而以说钱为卑鄙者,倘能按一按他的胃,那里面怕总还有鱼肉没有消化完,须得饿他一天之后,再来听他发议论。
대개 밥은 돈을 주고 사야 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돈을 비천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만일 그의 위를 눌러 볼 수 있다면 그 속에는 미처 소화되지 않은 생선과 고기가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루 동안 그를 굶긴 다음에 다시 그의 시빗거리를 들어 보아야 합니다.
所以为娜拉计,钱,——高雅的说罢,就是经济,是最要紧的了。
그래서 노라를 위해 생각해보건대, 돈이, 고상하게 말하자면 바로 경제가 가장 중요하단 말입니다. 
自由固不是钱所能买到的,但能够为钱而卖掉。
자유는 물론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돈 때문에 팔아 버릴 수도 있습니다. 
人类有一个大缺点,就是常常要饥饿。
인류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결점이 있는데, 바로 늘 배가 고프다는 점입니다. 
为补救这缺点起见,为准备不做傀儡起见,在目下的社会里,经济权就见得最要紧了。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꼭두각시가 되지 않도록 준비하기 위해, 오늘날 사회에서 경제권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第一,在家应该先获得男女平均的分配;第二,在社会应该获得男女相等的势力。
첫째, 가정에서는 우선 남녀에게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사회에서는 남녀가 서로 대등한 세력을 차지해야 합니다. 
可惜我不知道这权柄如何取得,单知道仍然要战斗;或者也许比要求参政权更要用剧烈的战斗。
안타깝게도 저는 이러한 권리를 어떻게 얻을지 모릅니다. 다만 여전히 투쟁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참정권을 요구할 때보다 더욱 격렬한 투쟁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要求经济权固然是很平凡的事,然而也许比要求高尚的参政权以及博大的女子解放之类更烦难。
경제권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아주 평범한 일이지만, 그러나 아마 고상한 참정권과 커다란 여성해방을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번거롭고 어려울 것입니다. 
天下事尽有小作为比大作为更烦难的。
세상일이란 작은 일이 큰일보다 더욱 번거롭고 어려운 법입니다. 
譬如现在似的冬天,我们只有这一件棉袄,然而必须救助一个将要冻死的苦人,否则便须坐在菩提树下冥想普度一切人类的方法〔7〕去。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은 겨울에 우리에게 솜옷 한 벌뿐이 없는데, 그렇지만 당장에 얼어 죽을 불쌍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보리수 아래에 앉아 온 인류를 제도할 방법을 명상해야 한다고 해봅시다. 
普度一切人类和救活一人,大小实在相去太远了,然而倘叫我挑选,我就立刻到菩提树下去坐着,因为免得脱下唯一的棉袄来冻杀自己。
온 인류를 제도하는 일과 한 사람을 살리는 일은 그 크기에 있어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만, 저더러 선택하라고 하면 저는 당장에 보리수 아래로 가서 앉겠습니다. 왜냐하면 한 벌뿐인 솜옷을 벗어 주고 얼어 죽기는 싫기 때문입니다. 
所以在家里说要参政权,是不至于大遭反对的,一说到经济的平匀分配,或不免面前就遇见敌人,这就当然要有剧烈的战斗。
그래서 가정에서는 참정권을 요구한다고 해도 크게 반대에 부딪치지 않겠지만, 경제적인 평등한 분배를 말했다가는 아마 눈앞에서 적을 만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격렬한 전투를 벌여야 할 것입니다.
战斗不算好事情,我们也不能责成人人都是战士,那么,平和的方法也就可贵了,这就是将来利用了亲权来解放自己的子女。
전투란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또 사람마다 죄다 전사가 될 책임을 지울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평화적인 방법도 소중한 것일 텐데, 이는 바로 친권을 이용해 자신의 자녀를 해방시킬 일입니다.
中国的亲权是无上的,那时候,就可以将财产平匀地分配子女们,使他们平和而没有冲突地都得到相等的经济权,此后或者去读书,或者去生发,或者为自己去享用,或者为社会去做事,或者去花完,都请便,自己负责任。
중국에서는 친권이 최고이므로 그 때 가서 자녀들에게 재산을 균등하게 분배하여 그들에게 평화스럽고 충돌 없이 서로 대등한 경제권을 갖도록 해 주면 됩니다. 그런 다음에 공부를 하든, 돈을 벌든, 자신을 위해 써버리든, 사회를 위해 일하든, 다 써 버리든 제 마음대로 하도록 하고 스스로 책임지게 하면 됩니다. 
这虽然也是颇远的梦,可是比黄金世界的梦近得不少了。
이것도 비록 요원한 꿈이기는 하지만 황금세계의 꿈보다는 훨씬 가깝습니다. 
但第一需要记性。
그러나 첫째로 기억력이 필요합니다. 
记性不佳,是有益于己而有害于子孙的。
기억력이 좋지 않으면 자기에게는 이로우나 자손에게는 해롭습니다. 
人们因为能忘却,所以自己能渐渐地脱离了受过的苦痛,也因为能忘却,所以往往照样地再犯前人的错误。
사람들은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 겪었던 고통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고, 또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종종 예전 그대로 이전 사람의 잘못을 다시 범하게 됩니다. 
被虐待的儿媳做了婆婆,仍然虐待儿媳;嫌恶学生的官吏,每是先前痛骂官吏的学生;现在压迫子女的,有时也就是十年前的家庭革命者。
학대당한 며느리가 시어머니가 되면 그대로 며느리를 학대하고, 학생을 미워하는 관리마다 이전에 관리들을 욕하던 학생이었습니다. 지금 자녀를 억압하는 사람도 때로는 10년 전에 가정혁명가였습니다. 
这也许与年龄和地位都有关系罢,但记性不佳也是一个很大的原因。
이는 아마 연령과 지위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만,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도 커다란 원인의 하나입니다. 
救济法就是各人去买一本note-book〔8〕来,将自己现在的思想举动都记上,作为将来年龄和地位都改变了之后的参考。
이에 대한 구제법은 바로, 각자가 노트북(note-book) 한 권씩을 사서 지금 자신의 사상과 행동을 다 기록해 두고 앞으로 연령과 지위가 바뀔 때마다 참고로 삼는 것입니다. 
假如憎恶孩子要到公园去的时候,取来一翻,看见上面有一条道,“我想到中央公园去”,那就即刻心平气和了。
가령 아이가 공원에 가려는 것을 몹시 싫어하게 될 때, 그것을 꺼내서 펼쳐 보고 거기서 “나는 중앙공원에 가고 싶다”라는 글귀를 발견하게 되면 즉시 마음이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别的事也一样。
다른 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世间有一种无赖精神,那要义就是韧性。
세상에는 깡패정신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요점은 바로 끈기입니다. 
听说拳匪〔9〕乱后,天津的青皮,就是所谓无赖者很跋扈,譬如给人搬一件行李,他就要两元,对他说这行李小,他说要两元,对他说道路近,他说要两元,对他说不要搬了,他说也仍然要两元。
권비의 난이 일어난 뒤에 톈진의 건달들이 바로 이른바 무뢰한들이 크게 날뛰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남의 짐을 하나 옮겨 주면서 그들은 2위안을 요구하고, 짐이 작다고 말해도 그들은 2위안을 내라고 하고, 길이 가깝다고 말해도 그들은 2위안을 내라고 했답니다. 
青皮固然是不足为法的,而那韧性却大可以佩服。
물론 건달을 본받을 것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그 끈기만은 크게 감탄할 만합니다. 
要求经济权也一样,有人说这事情太陈腐了,就答道要经济权;说是太卑鄙了,就答道要经济权;说是经济制度就要改变了,用不着再操心,也仍然答道要经济权。
경제권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일을 너무 낡은 수법이라고 말하더라도 경제권을 요구한다고 대답해야 하고, 너무 비천한 것이라고 말해도 경제권을 요구한다고 대답해야 하고, 경제제도가 곧 바뀔 것이므로 조바심을 낼 필요까지 없다고 말하더라도 여전히 경제권을 요구한다고 대답해야 합니다.
其实,在现在,一个娜拉的出走,或者也许不至于感到困难的,因为这人物很特别,举动也新鲜,能得到若干人们的同情,帮助着生活。
사실 오늘날에 노라 한 사람이 집을 나갔다면 아마 곤란을 느낄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물은 아주 특별하고 행동도 신선하여 몇몇 사람의 동정을 얻어 도움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生活在人们的同情之下,已经是不自由了,然而倘有一百个娜拉出走,便连同情也减少,有一千一万个出走,就得到厌恶了,断不如自己握着经济权之为可靠。
사람들의 동정을 얻어 살아가는 것은 이미 자유롭지 못한 일인데다가, 만일 100명의 노라가 집을 나갔다면 동정도 줄어들 것이고, 1,000명의 노라가, 10,000명의 노라가 집을 나갔다면 미움을 받을 것이니 결코 스스로 경제권을 쥐는 것만큼 든든하지는 못합니다.
在经济方面得到自由,就不是傀儡了么?
경제적인 면에서 자유를 얻었다면 꼭두각시가 아닌가요? 
也还是傀儡。
그래도 꼭두각시입니다. 
无非被人所牵的事可以减少,而自己能牵的傀儡可以增多罢了。
다만 남에게 조종당하는 일은 줄어들 수 있지만 자기가 조종할 수 있는 꼭두각시는 더 늘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因为在现在的社会里,不但女人常作男人的傀儡,就是男人和男人,女人和女人,也相互地作傀儡,男人也常作女人的傀儡,这决不是几个女人取得经济权所能救的。
왜냐하면 오늘날 사회에서 여자는 늘 남자의 꼭두각시가 될 뿐 아니라 바로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사이에서도 서로 꼭두각시가 되고, 남자도 늘 여자의 꼭두각시가 되고 있는데, 이는 결코 몇몇 여자가 경제권을 얻음으로써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但人不能饿着静候理想世界的到来,至少也得留一点残喘,正如涸辙之鲋〔10〕,急谋升斗之水一样,就要这较为切近的经济权,一面再想别的法。
그러나 사람은 굶으면서 이상세계가 도래하기를 얌전히 기다릴 수는 없고, 적어도 목숨이라도 부지해야 합니다. 마른 수레바퀴 자국에 빠진 붕어에게는 한 되나 한말의 물을 공급해 주는 것이 급한 일인 것처럼 바로 비교적 가까이에 있는 경제권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 다른 방도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如果经济制度竟改革了,那上文当然完全是废话。
만약 경제제도가 개혁된다면 앞에서 말한 것은 당연히 전부 쓸데없는 말입니다. 
然而上文,是又将娜拉当作一个普通的人物而说的,假使她很特别,自己情愿闯出去做牺牲,那就又另是一回事。
그렇지만 앞에서 또 노라를 보통의 인물로 보고서 말한 것이며, 가령 그녀가 아주 특별하여 스스로 뛰쳐나가 희생이 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면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我们无权去劝诱人做牺牲,也无权去阻止人做牺牲。
우리는 남에게 희생을 권유할 권리도 없고 남이 희생하는 것을 막을 권리도 없습니다. 
况且世上也尽有乐于牺牲,乐于受苦的人物。
더욱이 세상에는 희생을 즐기고 고생을 즐기는 인물도 있게 마련입니다. 
欧洲有一个传说,耶稣去钉十字架时,休息在Ahasvar〔11〕的檐下,Ahasvar不准他,于是被了咒诅,使他永世不得休息,直到末日裁判的时候。
유럽에 이러한 전설이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갈 때 아하스바르의 처마 아래서 쉬려고 하였는데, 아하스바르는 예수를 허락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그는 저주를 받아 최후의 심판 때까지 영원히 쉴 수 없게 되었습니다. 
Ahasvar从此就歇不下,只是走,现在还在走。
아하스바르는 이때부터 쉬지 못하고 다만 걸을 뿐인데, 지금도 걷고 있습니다. 
走是苦的,安息是乐的,他何以不安息呢?
걷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편히 쉬는 것은 즐거운 일인데, 그는 어째서 편히 쉬지 않을까요? 
虽说背着咒诅,可是大约总该是觉得走比安息还适意,所以始终狂走的罢。
비록 저주를 짊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아마 틀림없이 걷는 것을 편히 쉬는 것보다 더 달가워하며 계속 미친 듯이 걷는 것입니다.
只是这牺牲的适意是属于自己的,与志士们之所谓为社会者无涉。
다만 이 희생을 달가워하는 것은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지사들의 이른바 사회를 위한다는 것과 무관합니다. 
群众,——尤其是中国的,——永远是戏剧的看客。
군중, 특히 중국의 군중이요, 영원히 연극의 관객입니다. 
牺牲上场,如果显得慷慨,他们就看了悲壮剧;如果显得觳觫〔12〕,他们就看了滑稽剧。
희생이 무대에 등장하였을 때, 만약 기개가 있다면 그들은 비장극을 본 것이고, 만약 벌벌 떨고 있다면 그들은 골계극을 본 것입니다. 
北京的羊肉铺前常有几个人张着嘴看剥羊,仿佛颇愉快,人的牺牲能给与他们的益处,也不过如此。
베이징의 양고기 점포 앞에는 늘 몇몇 사람이 입을 헤 벌리고 양가죽을 벗기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자못 유쾌해 보입니다. 사람의 희생이 그들에게 주는 유익한 점도 역시 그러한 것에 불과합니다. 
而况事后走不几步,他们并这一点愉快也就忘却了。
게다가 구경 뒤에는 몇 걸음 가지도 않고 그들은 이 약간의 즐거움마저도 망각해 버립니다. 
对于这样的群众没有法,只好使他们无戏可看倒是疗救,正无需乎震骇一时的牺牲,不如深沉的韧性的战斗。
이러한 군중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아예 그들이 볼 수 있는 연극을 없애 버리는 것이 도리어 치료책입니다. 바로 일시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희생은 필요 없고 묵묵하고 끈기 있는 전투가 훨씬 낫습니다.
可惜中国太难改变了,即使搬动一张桌子,改装一个火炉,几乎也要血;而且即使有了血,也未必一定能搬动,能改装。
안타깝게도 중국은 바꾸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설령 탁자 하나를 옮기고 화로 한 개를 달리 놓으려 해도 피를 흘려야 할 지경입니다. 게다가 피를 흘렸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옮길 수 있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不是很大的鞭子打在背上,中国自己是不肯动弹的。
커다란 채찍이 등에 내려쳐지지 않으면 중국은 스스로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我想这鞭子总要来,好坏是别一问题,然而总要打到的。
저는 이 채찍이 어쨌든 내려쳐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별개 문제이고, 어쨌든 내려쳐질 것입니다. 
但是从那里来,怎么地来,我也是不能确切地知道。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내려쳐질지 저도 확실하게 알 수 없습니다.
我这讲演也就此完结了。
이번 저의 강연을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주석:
〔1〕本篇最初发表于一九二四年北京女子高等师范学校《文艺会刊》第六期。同年八月一日上海《妇女杂志》第十卷第八号转载时,篇末有该杂志的编者附记:“这篇是鲁迅先生在北京女子高等师范学校的讲演稿,曾经刊载该校出版《文艺会刊》的第六期。新近因为我们向先生讨文章,承他把原文重加订正,给本志发表。”〔3〕瑙威 通译挪威。
〔4〕人形,日语,即人形的玩具。
〔5〕李贺(790—816),字长吉,昌谷(今河南宜阳)人,唐代诗人。一生官职卑微,郁郁不得志。著有《李长吉歌诗》四卷。关于他“玉楼赴召”的故事,唐代诗人李商隐《李贺小传》说:“长吉将死时,忽昼见一绯衣人,驾赤虬,持一版,书若太古篆或霹雳石文者,云:‘当召长吉。’长吉了不能读,[焱欠]下榻叩头言:‘阿弥女老且病,贺不愿去。’绯衣人笑曰:‘帝成白玉楼,立召君为记,天上差乐不苦也。’长吉独泣,边人尽见之。少之,长吉气绝。”
〔6〕阿尔志跋绥夫(1878—1927),俄国小说家。他的作品主要描写精神颓废者的生活,有些也反映了沙皇统治的黑暗。十月革命后逃亡国外,死于华沙。下文所述是他的小说《工人绥惠略夫》中绥惠略夫对亚拉借夫所说的话,见该书第九章。
〔7〕这是借用关于释迦牟尼的传说。相传佛教始祖释迦牟尼(约前565—前486)有感于人生的生老病死等苦恼,在二十九岁时立志出家修行,遍历各地,苦行六年,仍未能悟道,后坐在菩提树下发誓说:“若不成正觉,虽骨碎肉腐,亦不起此座。”静思七日,就克服了各种烦恼,顿成“正觉”。
〔8〕Note-book,英语:笔记簿。
〔9〕拳匪,一九○○年(庚子)爆发了义和团反对帝国主义的武装斗争,参加这次斗争的有中国北部的农民、手工业者、水陆运输工人、士兵等广大群众。他们采取了落后迷信的组织方式和斗争方式,设立拳会,练习拳棒,因而被称为“拳民”,当时统治阶级和帝国主义者则诬蔑他们为“拳匪”。
〔10〕“涸辙之鲋”,战国时庄周的一个寓言,见《庄子·外物》:“庄周家贫,故往贷粟于监河侯。监河侯曰:‘诺,我将得邑金,将贷子三百金,可乎?’庄周忿然作色曰:‘周昨来,有中道而呼者,周顾视车辙中,有鲋鱼焉。周问之曰:“鲋鱼来,子何为者邪?”对曰:“我东海之波臣也,君岂有斗升之水而活我哉!”周曰:“诺,我且南游吴越之王,激西江之水而迎子,可乎?”鲋鱼忿然作色曰:“吾失我常,与我无所处,吾得斗升之水然活耳,君乃言此,曾不如早索我于枯鱼之肆。”
〔11〕Ahasvar,阿哈斯瓦尔,欧洲传说中的一个补鞋匠,被称为“流浪的犹太人”。
〔12〕觳觫,恐惧颤抖的样子。《孟子·梁惠王》:“吾不忍其觳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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