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현장의 결합으로 승부를 걸다 -LO, 프랑스 트로츠키주의 정당 노동자 투쟁

원칙과 현장의 결합으로 승부를 걸다 
- 21세기에 빛을 발한 트로츠키주의 반공개 정당 - 

사회당 정책위원장 최광은

(1) 좌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2002년 프랑스 대선 

  2002년 4월 21일 16명의 후보가 출마한 프랑스 대선이 있었다. 1차 투표에서 국민전선의 르펜이 사회당의 조스팽을 제치고 2위를 차지하며 결선에 진출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극우파 후보가 결선 투표에 진출한 것은 1958년 제5공화국 체제가 성립된 이후 처음이었다. 

  1차 투표에서 16.18%를 득표한 사회당의 조스팽을 제외하면, 좌파로 분류되는 정당들 중 노동자투쟁당(Lutte Ouvriere, 이하 LO)의 아를레뜨 라귀에(Arlette Laguiller)가 5.72%, 혁명적공산주의동맹(Ligue Communiste Revolutionnaire, 이하 LCR)의 올리비에 브장스노(Olivier Besancenot)가 4.25%를 득표했다. 이 두 정당의 지지율을 합하면 10%에 육박한다. 프랑스공산당(PCF)은 이 두 트로츠키주의 정당에도 못미치는 3.37%를 얻었다. 

  LO의 라귀에는 대선 전 여론조사에서 10% 가까운 지지를 받았다. LO가 내건 주요한 대선 공약은 ‘노동자 해고 금지법’이었다. 이는 좌파의 외피를 썼던 사회당의 조스팽 정부가 추진해 온 신자유주의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었다. 

  2002년 5월 5일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공화국연합의 시라크가 82.21%를 얻어 17.79%를 얻은 르펜을 이겼지만, 이는 시라크의 승리가 아니었다. 결선 투표는 사실상 ‘반르펜 국민투표’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1차 투표 이후 연일 프랑스 전역에서는 반르펜 시위가 벌어졌다. ‘똘레랑스 제로’ 정책을 내세운 르펜에게 프랑스 국민들은 똘레랑스를 보여주지 않았다. 

  결선 투표에서 다른 좌파정당들은 극우파를 제압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우파인 시라크의 지지를 선언했지만, LO는 “극우파와는 거리에서 싸울 것”이라며 이에 동참하지 않았다. 라귀에는 타 정당들의 ‘시라크 대통령 만들기’를 ‘정치적 매춘행위’로 규정하고, 결선 투표의 보이콧을 주장했다. 원칙을 위배하는 어떠한 정치적 고려도 단호히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2002년 대선은 극우파의 득세, 사회당의 추락과 공산당의 몰락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LO와 LCR은 좌파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른 세계를 꿈꾸는 변화의 열망은 식지 않았던 것이다. 


(2) 전 생애를 바친 여성 투사 라귀에 

  아를레뜨 라귀에는 전 생애를 노동자와 함께 투쟁하는 데 바친 올해 63살의 여성이다. 1940년 파리 근교의 가난한 노동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16살부터 프랑스의 유명한 은행인 크레디 리요네(Credit Lyonnais)의 행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투쟁에 나섰고, 트로츠키주의 그룹인 ‘노동자의 소리’에 가입했다. 1968년 6월 ‘노동자의 소리’가 해소했을 때 그녀는 LO 결성에 참여했고, 1973년에는 LO의 대변인이 되었다. 

  1974년 그녀는 크레디 리요네를 마비시키고 다른 은행들로 번진 두 달간에 걸친 대파업을 주도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대중의 주목을 받았고 그해 LO의 대선 후보가 되었다. 이 때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선 후보로 출마한 라귀에는 그 후 2002년 대선까지 내리 다섯 번을 출마했다. 비판자들은 그녀를 ‘붉은 미이라’라며 혹평하지만, 그녀는 정당이나 이념과는 다소 무관한 인기도 누리고 있다. 인터넷에는 그녀의 팬클럽까지 있다. 

  라귀에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화장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개인적인 취향만이 아니다. LO에서는 실제로 당원들이 자녀를 갖는 것은 물론 결혼 역시 금기시하고 있고, 여성들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아파트 책장에는 45권의 레닌 전집과 25권의 트로츠키 전집이 꽂혀 있다. 고루하기 보다는 원칙의 향기가 묻어난다. 당원들도 다이제스트보다 원전학습을 중요시한다. 항상 “Travailleuses, Travailleurs(여성노동자 그리고 남성노동자 여러분)”라는 말로 시작하는 그녀의 연설도 사뭇 인상적이다. 


(3) 베일에 싸인 LO, 그러나 진실한 역사 

  공공연한 정치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LO를 이끄는 것은 하디(Hardy, 본명은 로베르 바르시아 Robert Barcia)로 알려져 있다. 라귀에는 당 서열 7, 8위 정도의 인물로 추정된다. LO는 트로츠키주의 국제 조직인 국제주의자공산주의연합(UCI) 소속이며, 격주간지 <노동자투쟁>과 월간지 <계급투쟁>을 발간하고 있다. 

  일반인들은 LO의 중앙당이 어디에 있는지, 당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홈페이지에도 주소가 나와 있지 않고, 사서함 주소와 전화번호만 있다. 반공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LO는 대부분의 당원들이 가명을 사용하고,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의 당원 보증과 승인이 필요하며, 철의 규율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LO는 대부분 노동자 투쟁의 영역에서 공개적이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수행하고,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대선에서는 74년 2.35%, 81년 2.30%, 88년 1.99%, 95년 5.30%, 02년 5.72%를 득표했고, 98년 지방 선거에서는 4.50%를 득표해 20명의 공직자를 배출했다. 상원과 하원 의석은 아직 없고, 9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LCR과 연합하여 5.18%를 득표해 라귀에를 포함한 3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LO는 당의 주요 사항을 결정하기 위해 당대회를 매년 소집하고, 조직의 일상 활동에 관한 사항은 지역 조직들 산하의 기초 조직들이 결정한다. 기초 조직들은 시 단위, 기업 단위, 산업 분야에서 써클이나 세포 혹은 기업 신문을 만드는 모임 등으로 구성된다. 활성화된 기초 조직들로 인해 LO는 대부분의 당들과 달리 과도한 행정 기구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LO의 기업 그룹들은 자체적으로 2주에 한 번씩 신문을 발간하는데, 당적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톱 기사 하나만은 공통으로 넣는다. 나머지는 기업 그룹들이 작성, 출판, 배포를 책임진다. 이렇게 해서 400여개에 달하는 기업 신문이 발간되는데, 이 신문들을 접하는 독자는 대략 50만 명에 달한다. 또한 기업에서 활동하는 당원들은 노조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며, 그들 다수는 프랑스 최대의 노조 연합체인 노동총동맹(CGT)에서 활동한다. 

  한편, 당원들은 몇몇 도시들에서 ‘레온 트로츠키 써클’ 혹은 ‘노동 연구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문제를 다루는 별도의 모임도 갖는다. ‘레온 트로츠키 써클’은 거의 매달 모임을 갖는데, 파리의 경우 이런 모임에 대략 1,000명에서 1,500명 정도가 참가한다. 

  노동계급의 입장에서 꾸준히 자신의 활동을 전개하며, 거대한 자본의 힘에 맞서온 LO는 우리에게 원칙의 문제와 기업 단위 기초조직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는 바르시아가 쓴 <LO의 진실한 역사 Le veritable histoire de Lutte Ouvriere>라는 책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 우리에게 그 진실한 역사가 알려지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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