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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소설 같은 거

야우리 2012. 11. 24. 21:18
  저녁을 먹고 세미나 발제 준비를 하는데 동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 세상에 내가 어렸을 때 억울한 기억 하면 그게 계속 떠올라 아주 내가 나중에 그 여자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냥 아오...

  동생은 자기가 어렸을 때 어떤 이상한 아줌마한테서 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말투와 이야기가 웃겨서 나는 방에서 혼자 웃는다. 흐 헤 헤 헤 헤

- 너는 왜 그렇게 웃니 웃는게 그게 뭐냐.
 
엄마가 트집을 잡는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굳이 대답해봤자 말만 길어지고 피곤할게 뻔하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신경을 끄고 만년필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하 하 하 하 하

  그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팔짝팔짝 뛰며 웃는다. 방바닥의 진동이 여기까지 전해진다. 나는 만년필로 종이를 긁다가 이것저것 적기 시작한다. 오로라 입실론 - 나는 이게 부르주아적인 꽤 고상한 취향의 만년필이라고 생각한다 - 산지 얼마 안되어 아직 길이 덜 든 물건이다. 나는 지난 세달동안 작은엄마가 책임자로 있는 정부 유관기관 연구소에서 연구 보조로 일했다. 한 달에 110만원 남짓을 받았다. 그런 류의 단기계약직들이 흔히 그렇듯이 매일매일이 단순한 반복작업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엑셀을 작성했으면 내일은 표본 샘플을 정리하는, 그런 일을 했다. 아침 7시에 수원으로 출근해서 저녁 8시에 돌아왔다. 그 일을 하는 동안에는 주말이 그렇게나 기다려졌다. 책을 많이 읽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용역 회사 사장이 어느날 아침에 날 불러내서 이제 일을 하지 말라고 할 때도 내심 반가웠다. 그런데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원래 매일매일은 휴일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냥 휴일에 일하러 다닌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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