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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이야기

야우리 2013. 3. 18. 20:38

'킬링 필드' 로 유명한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주(캄푸치아 '캄보디아' 공산당) 정권(민주 캄푸치아)은 3년 9개월간의 집권기간 동안 약 150만명을 학살했다. 물론 이는 무리한 강제이주 정책으로 인한 기아, 돌림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들까지 모두 합산한 수치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 펜의 도심에 있는 '뚜올 슬렝' 감옥에는 연인원 1만 5천여명이 수용되었는데, 이 곳에서 살아남은 자는 단지 1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단 감옥에 끌려온 수용자는 무조건 '동조자' 3인의 이름을 적어야 했는데, 이렇게 끌려온 3인의 동조자들이 또 3명의 이름을 적고... 하는 식으로 시스템이 작동되었다. 수용자들에게는 모두 엄청난 고문들이 가해졌으며, - 가장 나이 어린 수용자는 9세 어린아이였다! - 그들이 고문에 못이겨 '자신이 크메르 루주를 배신했다는' 자술서에 서명하게 되면 그 즉시 줄줄이 묶인 채로 구덩이 앞에 끌려가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구타당한 뒤 매장되었다.

이러한 크메르 루주의 제노사이드는 미국을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베트남군이 그동안의 공격에 대해 반격해오면서 끝났다. 미군에게서 노획한 최신형 무기로 무장한 베트남군은 순식간에 수도 프놈 펜을 점령했고, 총리 폴 폿은 그 날로 사임했으며, '뚜올 슬렝' 감옥에 있었던 수감자들은 10여명을 남기고는 모두 살해당했다. 그 이후, 1979년부터 폴 폿과 크메르 루주 군대는 서부 캄보디아에서 1996년까지 게릴라전을 통한 훈 센 독재정부 전복을 꾀하였다. 그러나 1996년 캄보디아 공화국 정부와 캄푸치아 공산당 간의 평화협정으로 최고사령관 폴 폿과 다른 크메르 루주 제노사이드 혐의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폴 폿은 1998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나?

1978년 크메르 루주가 프놈 펜에서 축출된 이후, 베트남은 친베트남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 을 세웠다. 명목상 그들은 '크메르 루주의 학정에서 벗어나 캄보디아를 재건' 하겠다고 하였으나 사실 정부 구성원들 대부분은 옛 크메르 루주 출신이었고 대학살에도 가담하였던 자들이었다. 게다가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은 베트남 인민 공화국의 힘을 등에 업고 만들어진 괴뢰 정부였으므로 유엔 회의에서의 의석마저 크메르 루주의 민주 캄푸치아에게 할당되어 있었다. 또한 캄보디아 내의 반-베트남계 파벌들은 크메르 루주와 연합해 서부 캄보디아에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 를 세워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캄푸치아 인민 공화국은 1993년 북한에 망명해 있던 국왕 노로돔 시아누크를 다시 불러들이고 (그의 김일성과의 친분은 매우 유명하다. 평양에 그를 위한 저택도 지었다고.)입헌 군주국으로 헌법을 개정하면서 '캄보디아국' 이 되었다. 그러나 1979년 이래로 지금까지 '캄보디아인민당' 이 여당인 상태이며, 크메르 루주 또한 '민주 캄푸치아당' 으로 이름만 바꾼 채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1997년 친위 쿠데타 이후 훈 센은 계속 단독 수상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 그 또한 크메르 루주 정권에서 대학살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그는 공식적으로 '정치범은 없고 전과가 있는 정치인만 있을 뿐' 이라는 발언으로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사실상 거부했으며, 현재 많은 수의 캄보디아인들 또한 '킬링 필드' 라는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거나 심지어는 폴 폿을 존경하고 있는 형편이다. 폴 폿, 일찍이 프랑스 유학파로 프랑스 대혁명 3부작과 크로포트킨 따위를 읽고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인물이 어째서 킬링 필드와 같은 정치적 대학살을 저지르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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