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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전집(도서출판 b)의 '근대문학의 종언' 장을 정리해 보았다. 괄호와 들여쓰기는 작성자의 것 - 야우리



가라타니 고진


1.

문학이 근대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고, 그 때문에 특별한 중요성, 특별한 가치가 있었지만 그것은 이젠 사라졌다. 근대문학의 대명사는 소설이다. 따라서 근대문학이 끝났다는 것은 소설 또는 소설가가 중요했던 시대가 끝났다는 뜻이다. 사르트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문학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영구혁명 안에 있는 사회의 주체성(주관성)이다.”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이것은 혁명정치가 보수화되고 있을 때, 문학이야말로 영구혁명을 담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에크리튀르 개념의 출현은 근대문학으로서의 소설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이것이 일본에서는 1990년대였다.

2.

이 현상은 일본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서는 더 빠르게 일어났다. 1950년대 대중문화의 발달과 함께 미국문학은 마이너리티 문학이 되어갔다. 70년대 이후 흑인여성, 아시안 여성 작가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문학적 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회전체에 영향을 끼칠수는 없었다. 사실 ‘근대문학의 종언’을 정말 실감한 것은 한국에서였다. 한국에서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것은 그것이 노동자정치운동의 불가능성에 대한 대리적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이 가능하게 되면 학생운동은 쇠퇴한다. 한국에서는 문학이 학생운동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현실적으로 다른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학이 모든 것을 떠맡았던 것이다.

3.

근대문학(=소설)이 왜 특별한가?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18세기 들어 등장한 ‘미학’(aesthetics)개념은 중요하다. 본디 감성론이라는 의미인 미학은 감정에 대한 학문이다.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의 칸트를 통해 감성, 감정이 지적, 도덕적 능력(오성이나 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그리고 그들을 매개하는 것이 상상력이라는 사고가 등장했다. 따라서 그전까지 감성적 오락을 위한 수단이었던 소설에서 인식적이고 도덕적인 가능성이 발견되었다. 이렇게 소설은 ‘공감’의 공동체, 상상의 공동체인 네이션(민족)의 기반이 된다. 소설이 지식인과 대중 또는 다양한 사회계층을 ‘공감’을 통해 하나로 만들어 네이션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광수, 루쉰, 소세키 등의 근대소설이 했던 역할)

소설이 단지 감성적 쾌락이기만 하다면 그것은 미학적이지 않기에 문학의 짐 또한 많아진다. ‘종교와 문학’이니 ‘정치와 문학’이니 하는 논의는 이러한 맥락에서 생겨났다.‘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에서 대개 문학은 무력하고 반정치적으로도 보이지만, (제도화된)혁명정치보다 더 혁명적인 것을 가리킨다, 또 그것은 허구이지만 통상의 인식을 넘어선 인식을 보여준다는 식이었다. 사실 ‘정치와 문학’이라는 논의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산당에 대해 문학가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공산당(맑스주의, 내지는 혁명운동)의 권위가 사라진다면 이 아포리아 또한 사라진다. 

문학의 지위와 문학의 윤리적 과제는 상호비례한다. 따라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운 문학은 그저 오락이 될 뿐이다. 

(2010년대 남한에서 문학은 새로운 ‘윤리적’ 과제를 떠안은 것 처럼 보인다. 이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4.

근대국가(민족과 국가가 일치하는 네이션=스테이트)는 자신들의 ‘국어’를 만들면서 출현했다.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를 만들고 한문이 일본어가 되었듯이 모든 근대국가는 보편언어를 속어로 번역하면서 새로운 문어를 만들어냈다. 일본의 경우 메이지시대에 다시 구어에 기초한 문어를 만들어내야 했다. 상상력이 감성과 이성 사이를 매개하듯이 언문일치는 감성적, 감정적, 구체적인 것과 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연결했다. 이것은 소설을 통해 시작되었다.

전 세계 국민국가에 자본주의 세계화의 문화침투는 존재하지만, 이젠 예전같은 노골적 내셔널리즘은 등장하지 않고 있다. 경제적으로 불리하다면 사람들은 반발할 것이지만, 지금 그에 대한 노골적 반발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종교원리주의로써 나타난다.

(흥미롭게도 2019년 현재, 세계적 경기침체의 흐름은 세계화에 대한 노골적 반발인 민족주의적 우파포퓰리즘과 반세계화 좌파포퓰리즘을 등장시켰다. 미국의 트럼프와 샌더스,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 영국의 브렉시트 흐름과 제레미 코빈…)

5.

왜 근대문학에서 소설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 지적, 윤리적 과제를 떠맡았는가? 이건 기술적 측면과 관련이 있다. 전근대와는 다르게 근대소설은 묵독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내면적이다. 근대문학은 묵독되었을 때 그 참맛이 살아나며, 역시 리얼리즘적이고 낭만적인(이성과 감성의 대립에서 감성의 우위, 현실과 이상의 대립에서의 이상지향) 것이다.

6.

근대소설은 음성이나 삽화에서 독립된 것, 기본적으로 커다란 상상력을 요구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이성과 오성을 감성과 연결시킨다는 이야기, 그것에 대한 학이 미학이라 언급하였다) 그러나 영화가 나타나자 현실에 대한 묘사로의 리얼리즘은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는 사진이 나타났을 때 회화가 당한 일과 비슷하다. 근대회화가 출현하게 된 대상적(내용적)측면은 바로 중세회화의 신이나 역사 주제에서 현세를 주제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기하학적 원근법의 출현이다. 사진의 출현 이전까지 근대회화는 사진과 같은 원리를 추구했다. 하지만 사진 이후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는 무의미해졌기에 인상파 화가들은 사진으로 불가능한 것을 회화로 하고자 했다. 여기서 현대회화가 시작되었다. 

소설도 그렇다. 근대소설의 특징은 (총체적인)리얼리즘에 있다. 허구에 개연성과 핍진성을 부여하는 것이 근대소설의 과제였다. 근대소설의 리얼리즘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3인칭 객관묘사’의 출현으로 가능해졌다. 일본의 사소설은 지속적으로 1인칭 시점을 사용했지만, 그리고 아쿠타가와는 덤불 속에서 3인칭 객관의 허구를 지적했지만,(프랑스 앙티로망) 리얼리즘의 가치를 제거하면 근대소설의 가치 또한 사라진다. 그것은 그저 이야기가 된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진이 할 수 없는 것을 회화로 하고자 했듯이, 소설가들 또한 영화가 할 수 없는 것을 소설로 하고자 했다. 그것이 20세기의 모더니즘 소설들이다.(제임스 조이스 등) 그러나 소설의 상대는 영화뿐만이 아니었다. 텔레비전과 비디오, 그리고 컴퓨터까지 나타났다. 이런 이상 소설의 우위는 없어진다. 오늘날 만화의 인기는 옛 삽화 소설로의 회귀로 보이기도 한다.

이제 더 이상 문학은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지 못한다. 개발도상국의 독자들도 해리 포터를 읽지, 자신들에 대한 소설을 읽지는 않는다.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면 소설을 쓰기보다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겠다. 

7.

아룬다티 로이는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는다. 정치적인 글을 발표할 뿐이다. 이것은 문학이 책임지고 있던 사회적 역할이 끝났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제 진정한 의미의 근대소설과 그 소설가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보인다면 다만 그 잔영이 남아있을 뿐이다.

(2010년대 말 남한에서 문학이 갑작스레 윤리적 책임을 떠안은 것 처럼 보임이 바로 그 잔영이 아닐까?)

오늘날 문학이 건재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문학이 죽었다는 것을 폭로할 뿐이다. 소설이 팔리는 이유는 문학과는 상관없는 화제에 의한 것인데, 이것이 문학은 아직 번영한다는 허위의식을 조성한다.

(정말 멀쩡하다면 건재하다고 소리치지 않겠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많이 팔린 이유가 그 문학성 때문은 아니다)

8. 

근대문학의 종언은 세계자본주의의 전개 속에서 사고해야 한다. 그 전개과정은 다음과 같다.


1750~1810

1810~1870

1870~1930

1930~1990

1990~

세계자본주의

중상주의

자유주의

제국주의

후기자본주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국가

제국주의(다극)

영국(자유주의)

제국주의(다극)

미국(자유주의)

신제국주의(다극)

자본

상업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

국가독점자본

다국적자본

세계상품

모직물

섬유공업

중공업

소비재

정보

국가

절대주의

국민국가

사회주의/파시즘

복지국가

지역주의

에토스(시대정서)

소비적

금욕적


소비사회


사회심리

전통지향

내부지향


타인지향


주요예술

이야기

소설

영화

텔레비전

멀티미디어
















9.

‘사회심리’의 레벨을 생각해 보자,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은 그것의 변화가 ‘주체’의 문제로 나타난 것에 주목했다. 그는 사회를 전통지향형, 내부지향형, 타인지향형으로 분류했다.

내부지향형은 자율적인 자기를 가지며 쉽게 전통이나 타인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타인지향형은 객관적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전통지향형과 달리 그런 규범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타인지향이란 헤겔이 말한 것처럼 타인에 의해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 욕망의 주체들이 지향하는 ‘타자’란 각자가 서로를 의식해서 만든 상상물이다. 이 주체들은 전통 규범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자유로워 보이지만, 실은 주체성이 전혀 없다.

(헤겔의 ‘인정’개념: 서로 마주보는 두 개의 자기의식이 자신과 상대 모두 자유로운 존재라고 의식하는 것, 긍정적인 자기의식의 토대가 된다.)

[“배제의 지양은 이미 일어났다. 이 둘은 자신들 밖에서 존재하며, 이 둘은 하나의 지식이요, 서로에게 대상이다. 각각은 타자 속에서 자신을 의식하며, 그것도 지양된 것으로 의식한다. 마찬가지로 각각의 편에는 실정성이 있다. (...) 각각은 자신의 밖에서 존재한다."(Hegel, Jenaer Realphilosophie, p.209)]

미국에서 이것이 이렇게나 빨리 일어난 이유는 미국 사회에 내부지향성도 희박했기 때문이다. 내부지향성은 내적 자율성인데, 미국에는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것이 전통규범처럼 되었다. 이것이 미국의 체제순응주의다.

헤겔은 인정을 위한 투쟁이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인정투쟁이 끝나면 역사는 종언을 맞는다. 알렉산드르 코제브가 그랬다. 그것은 미국적인 대중소비사회며, 더 이상 투쟁이 없고 계급이 없는, 어떻게 보면 전적으로 타인지향적인 세계다. 극단적인 타인지향의 행위인 할복 문화를 보라. 일본 또한 그러하다. 세계는 미국이나 일본이 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미국이나 일본은 철학적으로 반성된(Reflexions) 형태이다.

(철학적 반성: 헤겔에 따르면, 반성은 상관적인 것들의 내적 관계를 나타낸다. 상관적인 두 가지 측면은 서로 구별되는 것이면서 또한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신의 규정을 갖고 있으며 양자의 성립은 동시적이다. 좌파가 있어야 우파가 있다. 내가 있어야 네가 있다.)

본디 일본에는 내부지향성이란 없었다. 그거 다 메이지유신 이후 생긴 것이다, 근데 80년대부터 그 어떤 ‘주체’나 ‘의미’를 조소하는 유희가 유행이 되었다. 이러한 일본 대중문화는 미국 대중문화를 한층 공허하게, 그러나 미적으로 세련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세계화되면서, 근대와 근대문학은 끝났다.

(고진의 말대로 한국에서는 ‘의미’에 대한 조롱이 2000년대 중반 들어서야 일어났다. 사회운동의 영역에서 전투적 학생운동이 붕괴하고, IMF 사태에서의 회복 이후 ‘부자 되세요’가 덕담으로서 부유하기 시작했을 때, 붉은악마의 붉은 물결이 시청과 광화문을 수놓았을 때, 같은 자리에서 붉은 깃발을 들었던 운동권들은 그것이 50년 묵은 ‘레드 컴플렉스’에서 탈피한 대중을 상징한다며 기뻐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이 진지한 사람들’로 낙인찍혀 2003년 미군 장갑차 살인사건 촛불집회에서 배제되기까지 한다. 2019년 오늘날 문학을 읽는 사람은 진지충일 뿐.)

10.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산업자본주의의 원동력은 ‘세속적 금욕’(프로테스탄트 정신)임을 강조했다. 이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실현의 지연이다. 일본에서 그것은 ‘입신출세주의’로 나타났다. 오늘날 이것은 입시경쟁으로 쭉 이어진다. 출세주의야말로 일본 근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지만 그렇다고 입신출세주의가 바로 근대문학은 아니다.

근대문학은 역으로 입신출세가 잘 되지 않을 때, 그것이 헛되다고 생각될 때 나타난다. 메이지 시기 자유민권운동의 좌절이라거나, 출세길이 막힌 구 막부 출신 무사 가문 출신들을 보라. 내부지향이 전제하는 근대적 자기라는 것은 전통이나 타인을 넘어서 자율적인 무언가를 구하는 것이다. 반면 입신출세주의는 철저한 타인지향이다. 물론 이것도 90년대 이후 점차로 해체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의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모르겠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입신양명은 현재 입시경쟁으로 이어지고 있고, 일제의 식민지배로 입신양명의 길이 차단된 조선인 인텔리들은 문학을 했다. 마찬가지로 IMF 사태 이후 입시경쟁은 점차로 해체되고 있으며, 입시경쟁과 학벌주의에 반대하여 활동했던 시민단체 ‘학벌없는사회’는 지난 2016년 자진 해산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학벌사회가 해체되어서가 아니라 그 양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학벌사회는 여전히 교육문제의 질곡으로 자리하고 있으나, 더 이상 권력 획득의 주요 기제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이와 조응해 한국 사회에서 문학이 어떤 윤리적, 정치적 책임을 지는 흐름이 다시 일어났다는 점은 흥미롭다.)

11.

근대문학이 끝났다고 해도 우리를 움직이는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인간성을 파괴하는 이에 대항할 필요가 있으나 여기서 문학에 어떤 역할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죽은 것을 왜 쓰는가? 우리는 왜 연구하는가?' 이 강연록이 주는 아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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