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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20150606

야우리 2015. 6. 7. 02:09

  서강대에서의 평등교육이 끝난 뒤, 그녀와 커피를 마시고 헤어져 동교동 삼거리의 헌책방에 들렀다. 홍대 쪽에 나올적마다 가는 그 곳이다. 이 곳의 진가는 1층이 아니라 2층에 있다. 2층이라는 규모에서 알 수 있겠지만, 굉장히 큰 헌책방이고 취급하는 물건들도 헌 책부터 LP, LD, CD, 테이프 까지 여러가지가 있다. 여러분들도 꼭 가 보시라. 꽤나 귀해 보이는 일본 만화들도 많다. 


  오늘도 여느 때 처럼 이 곳에 오면 항상 찾아보는 서울대 도서관에서 복사해 제본한, '불온서적' 도장이 찍혀 있는 영문판 레닌 전집을 찾고(항상 일정한 위치에 있는 것을 확인한다) 아는 사람만 아는 2층에 올라갔다. 2층에서는 항상 '조선로동당략사' 와 '스탈린선집' 을 찾아보고 아무데나 펼쳐 읽는다. 그리고 옛 '학회평론' 지가 있는지 찬찬히 둘러보려 하다가 오늘따라 LP들이 눈에 띄어 혹시 배호 같은 옛 가수들 앨범이 있는지 전수조사를 시작했다. 여기저기 LP와 옛 책들을 구하러 다닌 지 꽤 되었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들 중 하나가 배호와 비틀즈의 오리지날 앨범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세기와 더불어' 도 봤는데 말이다. 마스크를 쓴 채로 앉아 한시간 동안 찾은 결과 애창곡 '떠나가는 배' 와 건전가요 '어허야 둥기둥기' 가 수록된 정태춘과 박은옥의 LP 한 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오기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책과 LP 따위를 수집하는 사람, 아니 어떤 사람이라도 이렇게 무언가를 찾다 보면 오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테이프들이 쌓여 있는 곳에 가서 다시 테이프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잡다한 것들이 많았다. 홍콩 가수들의 앨범이라거나(장국영을 위시하여 유덕화 등이 한 때 굉장한 인기를 구가했던 것이 확실하다), 심지어 베트남에서 나온 베트남 전통음악 테이프도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몇가지 옛 노래 테이프들과 누군가가 복사한 노동자문예창작단 의 '바리케이트' 와 조국과 청춘 4집 테이프들을 찾을 수 있었다. 두 음반 모두 디지털화 하여 아이튠즈에 앨범아트까지 등록해 데이터베이스화 하였으나 옛 사람의 손길이 남아 있는 물리적 실체는 항상 유혹적이다. 결국 내가 원하던 것은 찾을 수 없었지만 작지 않은 수확이었다.


  이제 다시 책을 보기 시작했다. 옛 학회평론 을 한 권 구할 수 있었고,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 '인민의 수호전사' 허영철 선생의 자서전과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에 관련한 역사서, 나의 애송시인 블라지미르 마야꼽스끼의 시들 중 이미 가지고 있는 선집에 포함되지 않은 시들을 수록한 시집이 있었다. 그 말고도 헌책방에서 보기 어렵기도 하고 무거워 불편한 비봉판 자본론을 대체할 이론과실천판 자본 을 구했다. 원래는 살 계획이 없었으나 마침 99년에 인쇄한 '개역판' 이 여러 권 들어왔길래 1-1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보니 오후 9시였다. 중간중간 일어설 때 마다 빈혈 기운이 느껴지며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였으나(심장이 약해 오래 쪼그려 앉았다 일어서면 피가 머리까지 금방 올라오지 못해 그렇다) 간만에 많은 책들을 냄새맡고 보니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계산하러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은 2층과 달리 상큼한 책 냄새가 났다. 고서들이 많은 2층에서는 숙성된 치즈나 와인이 있는 창고 같은 느낌의 책 냄새가 난다면 1층에는 비교적 최근에 나온 책들이나 도록 들의 비중이 높아서 상큼하고 청량한 책 냄새가 난다. 계산대에 가 보니 항상 그곳을 지키시는 여주인님이 있지 않고 주인 내외의 이지적으로 생긴 큰따님이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많은 것 같지만 그 곳을 오가면서 봐 왔기에 참으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책과 음반 가격은 총 2만 5천원. 하나하나 얼마인가 묻고 테이프를 한 번 틀어볼 수 있겠냐고 물으니 지금 카세트의 테이프 재생 기능이 고장났다고, 안 나오면 가져오라고 한다. 괜히 말을 터 보고 싶어 한 마디 던졌다.

  "메르스가 무섭긴 무섭나 봐요. 심지어 유승준도 한국 오고 싶다는 말을 안 하고 있잖아요."

  그러자 그녀가 네, 하며 가볍게 웃더니 한참 먼지낀 물건들을 헤집느라 더러워진 내 손을 쳐다봤다.

  "이걸로 손부터 닦으세요." 

  그녀는 물티슈를 꺼내 내밀었다. 나는 닦는 둥 마는 둥 하며 책을 챙기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비닐봉투를 꺼내 물건들을 한데 담기 시작했다. 비닐봉투가 꽉 차서 넣을 수 없을 것 같자 그녀는 비닐봉투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가방에 책 몇권 정도는 들어가니까..."

  "아 그럼..."

  내 천가방에 나머지 책들을 넣고 인사를 한 뒤 그곳을 나왔다.


  나는 손에 쥔 영수증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며 웃었다. 그리고는 오렌지 다섯 개를 사들고 집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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