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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2. Calle del Labrador

야우리 2019. 1. 26. 23:21

“야 이 미친놈아!”
“오 그대 보이는가… 새벽녘의 여명에… 로켓의 붉은 섬광과 공중에서 작렬하는 포탄이… 오 말하라 성조기는 여전히 휘날리고 있는가…!”


미국식 피자를 먹지 못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파파존스 피자를 좋아합니다. 존스네 아빠가 만든 것이지요. 토핑이 과하지 않아서 각자의 맛이 살아있고 도우가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감칠맛이 돕니다. 미국에서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들이 한 판을 시켜서 트럭 뒷자리에 두었다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고독한 장거리 운수 노동자의 삶,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입니다. 학교에서 딱 400여미터만 걸어가면 마드리드 시내에 4개 있는 파파존스 지점에 갈 수 있다길래 ‘수페르 파파스’ 피자 작은 사이즈 한 판을 들고 집까지 걸었습니다. 포장해 가면 슈퍼 파파스 작은 것 한 판에 7.9유로라길래 주문했는데, 점원이 할인을 적용해주지 않아서 짧은 서어 실력으로 가격을 정정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기… 수페르 파파스 작은 것 한 판에 가져가면 7.9유로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영수증에는 10유로라고 쓰여 있다.”
“확인해 볼게… 미안해 더 거슬러줘야겠어.”
“발레. 고마워.”


이렇게 가격에 오류가 나는 일이 여기선 흔히 있는 일이지만, 특별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파파존스 피자를 들고 가는 길이니까요. 매일같이 추로스, 초콜릿, 엠빠나다, 하몽, 닭구이, 감자 오믈렛 따위를 먹다가 미국맛 피자를 먹는다니 혼자 들떠 버렸습니다. 입에선 저절로 미국 국가가 나왔습니다. 그러다 무단횡단을 했고, 운 나쁘게도 운전사에게 욕을 먹었습니다. 에스파냐의 국민 예술은 거리 낙서이며, 국민 스포츠는 무단횡단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무단횡단을 하다가 운전사에게 욕을 먹다니 어지간해서는 없는 일입니다. 이 곳 사람들은 미국 프랜차이즈들을 싫어합니다. 어딜 가나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낙서가 가득합니다. 맥도날드도, KFC도 시내에 손으로 가늠해 볼 정도밖에 없습니다. 정치토론을 하면 언제나 미 제국주의와 독점자본에 대한 성토가 이어집니다. 여기서도 좌파들은 코카콜라를 보면 ‘미 제국주의의 문화침투…’ 운운하더군요. 사람 사는 것은 어딜 가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그것에 있어서 제게 욕을 했던 운전수는 어쩌면 저보다 파파존스 피자가 더 아니꼽게 보였던 것 아닐까 싶습니다.


뜨거운 피자에서 계속 김이 나는 탓에 버스를 탔습니다. 따끈따끈한 피자를 무릎에 얹고 있으니 저절로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됩니다. 신사 양반에게 미안하다며 옆자리의 세뇨르가 내려야 하니 비켜달라고 합니다. 갑자기 움직이다 보니 무릎 위의 피자 상자가 떨어지지 않을까 앞자리 세뇨라가 걱정하며 잡아줍니다.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Nada.” 나-다, 아니에요. 이 곳 사람들의 나-다 는 듣는 사람 마음을 편하게 합니다. 발레! 그라시아스! 나-다. 새삼스레 제가 정말 친절한 사람들 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헌책방 행사에 가는 길에 지갑을 도둑맞았다고 하니 한국에서 온 동지가 지갑을 잃어버렸다며 교통비라도 모아주자고 하는 사람들, 처음 보는 이방인을 사교클럽에 가입시켜 주는 클럽 대표, 한국에서 일종의 맑스-레닌주의 운동을 했다고 하니 굳이 바쿠닌 책을 선물하면서 동지에게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며 추천하는 아나키스트, 그걸 보고 연기 자욱한 저택 로비에서 “오, 좋은 시작이야!” 라며 맥주를 권하는 아나키스트,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 디너 당일 예약을 도와달라고 하니 스스럼없이 “내가 그러라고 여기 있는 거잖아” 하며 예약해준 사교클럽 컨시어지, 집 앞을 서성이던 동양인 청년에게 자신을 ‘동지’라고 부르라며 집에 초대한 68세대 공산주의자 노인, 그리고 온종일 차려입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실존주의자 흉내를 내는 동학에게 굳이 말을 걸고 친해지고 싶다고 하는 플로리다에서 온 친구들까지, 아 그리고 “당신들에겐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며 술을 사주던 카탈루냐인 사업가도 있었습니다.


버스가 거쳐가는 곳 중에 라브라도르 거리가 있었습니다. 집은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마는, 그 곳에서 차가운 닭튀김과 감자튀김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냉동 닭을 대충 튀긴 프라이드 치킨은 비린 맛이 났고 감자튀김은 특별한 풍미 없이 뭉툭하기만 했습니다. 목이 메였습니다. 수돗물을 받아 먹었습니다. 감자튀김은 너무나도 차갑게 식어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수돗물에 감자튀김을 삶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역시 프라이드 치킨은 조국의 것이 제일입니다. 마주앉아 혼자서 감자튀김을 먹었습니다.


뻑뻑한 감자튀김처럼, 틈이 없다고 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저는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들은 저를 알던 뻑뻑한 곳에서 아무도 저를 모르는 곳으로 오니 거기서 생기는 그 틈이라는 것이 느껴지더군요. 그 전에는 모든 일에서 중심이 되고자 기를 썼고, 그렇지 못하면 슬퍼했습니다. 과장 좀 보태서 내가 한 마디 하면 학교가 뒤집어지고 사람들이 매달렸다지만 지금 이곳엔 저를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곳에 와서 조금 더 긴 호흡으로 주변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고, 주변인들을 있는 그대로 아끼면서 연구 주제를 찾아보고 삶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정념적인 글이라도 다시 쓸 수 있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각종 선전선동 문건을 작성하고 첨삭하면서 문필은 혁명의 무기이며 모든 문필가의 궁극적 존재이유는 그의 계급에 봉사하는 것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물론 사르트르가 말했던 대로 지식인의 존재이유는 자신을 시대에 기투하는 것이란 생각은 변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정념적인 글을 쓰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집 앞 와인샵 주인과 토론 끝에 굉장한 와인을 샀습니다. 이 곳에서 마신 와인들 중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만한 것입니다. 베리류의 향이 두드러지는 것은 같지만, 민트 맛이 감돌면서 와인이 열릴 수록 타닌이 더해서 느껴집니다. 이 맛을 기억할 수 없음이 아쉬울 정도입니다. 와인 맛을 이렇게 면밀히 보게 된 것도 오랜만입니다.


역시, 제게도 틈이 필요했던 겁니다. 물론 그립겠지만, 돌아가는 그 날까지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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