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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치의 맛 이미지 검색결과


방어도 공격도 강철과 같이

떠 있는 성이니 믿음직하네

떠 있는 성은 해가 뜨는 곳

황국의 사방을 수호하리라

- 토리야마 히라쿠 작사, 세토구치 토키치 작곡, 군함 행진곡, 1900



꽁치는 꽁무늬도 비치지 않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꽁치의 맛, 등장인물들은 소박한 일상을 꾸려나가며 줄곧 술을 마신다. 이렇다할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 딸의 결혼은 대단한 사건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언급되지만 정작 결혼식 장면은 나오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자꾸만 빈 곳을 비춘다. 아무도 없는 집, 텅 빈 거리 같은 곳을. ‘우연히’ 만난 사람들은 술을 마시다가 실없는 농담을 하고, 고전음악이 배경에 깔린다. 동시기 누벨바그 영화나 그 영향을 받은 홍상수 감독 영화들이 생각나는 지점들이다. 흔히들 오즈 야스지로를 오리엔탈리즘을 걷어내고 볼 때 유럽에서 높이 평가받는 몇 안 되는 일본 영화감독들 중 하나라고 하는데, 이런 기술적 유사함은 분명 그 이유들 중 하나일 것이다. 

세 아들딸을 두고 중년의 기업체 중역으로 일하는 주인공 히라야마 슈헤이는 우연히 중학 시절의 은사를 만난다. 중학 시절 친구들의 술자리에 은사를 초대하지만 왕년의 깐깐했던 ‘표주박’ 선생은 이제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제자들이 대접하는 술과 음식을 감읍하며 먹기에 바쁜 노인이 되어 버렸다. 술자리에서 남은 술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흐느적거리며 돌아가는 옛 스승의 집은 허름한 라멘집이다. 몸에 맞지도 않는 양복 차림으로 아기처럼 유쾌하다고 읊조리는 표주박 선생의 곁에서는 한 때 히라야마와 친구들 사이에서도 회자되던 딸이 시집도 가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함께 늙어가고 있다. 얼마 뒤, 표주박과 다시 함께 한 술자리에서 그는 술에 취해 슬퍼한다.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것인데, 자신은 그걸 참지 못하고 딸을 시집보내지 않아 딸의 인생마저 망쳐버렸다고. 그 모습을 본 주인공은 과년한 딸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가 늦기 전에 딸을 시집보내기로 결심하고 공작(?)에 착수한다. 

그 가운데 일본제국의 패전 이전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제국해군의 군가였던 군함 행진곡이 여러번 등장한다. 표주박 선생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라멘집 손님으로 있던 해군 출신 사내는 히라야마를 보자 “함장님!” 하며 경례한다. 옛 부하 사카모토는 히라야마를 단골 바에 데려가 마담에게 군함 행진곡을 틀어달라 청한다. 부끄러워하는 주인공에게 지금은 평범한 삶을 사는 그이지만 한 때 구축함 아사카제(아침바람)의 함장으로 대양을 가르던 젊은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굳이 상기시키려는 듯이.

꽁치의 맛의 개봉은 196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연합군의 군정이 끝난지 정확히 10년이 되는 해였으며 태평양전쟁이 종전된지도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해였다. 작중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이 중학교를 졸업한 지 40여년이 지났다고 언급되니 기실 주인공은 청년기를 일본제국이 전성기를 누리다 태평양 이곳저곳서 전쟁을 벌이고 패전국 신세로 떨어지는 그 시기에 보낸 셈이다. 방위성 편찬 일본해군 전사총서에 따르면 가미카제급 구축함 아사카제는 1922년 진수되어 1944년 중순 필리핀 근해에서 미군 잠수함에게 격침당했다. 연합함대 제5구축대 소속으로 활동했지만 큰 전공을 세운 바는 없고 역대 함장에는 해군병학교(해군사관학교) 출신 대위나 소좌(소령)가 부임했다. 20년대 중후반에 5년제 구제중학을 나와 해군병학교에 진학했다면 45년 당시에는 중좌 정도 계급으로 패전을 맞았을테니 그다지 승승장구한 축은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구축함 함장으로 수백의 승조원을 지휘하며 착실한 장교로 살았던 시절을 주인공은 옛 부하 앞에서도 먼저 입에 올리지 않는다. 주인공의 전쟁체험은 폐허로 남은 변두리 시가지나 전쟁 시절 기억을 가끔 언급하는 조연들을 통해 넌지시 비칠 뿐이다. 

싸구려 위스키를 마시다 멋쩍어하는 히라야마 옆에서 옛 부하는 “함장님, 일본이 왜 패전했을까요? 패전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뉴욕 빠칭코가 아니라 진짜 뉴욕에서 놀고 있었을 거라고요. 일본이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금발벽안의 미국인들이 게이샤 머리를 하고 사미센을 켜고 있지 않았을까요.” 하며 실없는 질문을 늘어놓는다. 주인공의 대답은 의미심장하다. 

“글쎄, (그 모습을 생각해보니) 전쟁에서 진 게 다행 아니었을까?”

이 때 군함 행진곡이 흐르며 술에 취한 옛 부하를 필두로 술집 사람들은 능청스레 해군 경례를 흉내낸다. 모두들 웃고 히라야마도 웃지만 그는 왠지 겉돌고 있다. 그저 경례하며 웃는 바의 마담에게서 사별한 아내의 편린을 발견할 뿐이다. 얼마 뒤, 돌아가신 너희 어머니와 닮은 마담이 있다며 장남을 데려간 같은 바에서 마담이 ‘그 행진곡’을 틀어드리겠다고 하자 주인공은 한사코 만류한다. ‘그 행진곡’이 무엇이냐며 채근하는 아들에게도 주인공은 “별 것 아니”라며 일축한다.

마침내 딸을 시집보낸 날 저녁 히라야마는 같은 바를 다시 찾는다. 결혼식에서 입던 연미복 차림으로 바에 들어간 주인공은, 새삼스레 먼저 군함 행진곡을 틀어달라 청한다. 제목부터 맥거핀인 영화 아니랄까봐 딸의 결혼식은 나오지도 않지만 어쨌든 딸을 시집보낸 주인공은 허탈함 때문인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전시뉴스에서 제국해군의 승전보를 전할 때 항상 깔리던 군함 행진곡이 연주되자 옆 자리 손님들은 만담을 시작한다.

“대본영 발표, 제국해군은 금일 새벽 5시 30분을 기해 미나미토리 섬 동쪽 해상에서…”

“졌습니다.”

“그렇지요, 졌지요!”

히라야마는 만담 끝에 와하하 웃는 그들을 쳐다보더니 씩 웃고는 내처 술을 마신다. 그리고 취한 채로 집에 들어온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막내아들 앞에 앉아, 히라야마는 읊조린다.

“방어도 공격도 강철과 같이… 떠 있는 성이니 믿음직하네… 외톨이가 되었군… 떠 있는 성은 해가…”

자야 하는데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며 짜증을 부리는 막내아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중얼거리던 주인공은   이제는 비어 있는 딸의 방 문 앞에서 눈물을 흘리다 부엌에 구부정하게 홀로 앉아 물을 마신다. 카메라는 히라야마의 굽은 등을 오랫동안 비춘다. 

꽁치의 맛의 영문 제목은 An Autumn Afternoon, ‘가을날의 오후’다. 쨍하던 여름은 이제 지났다. 겨울은 오지 않았지만 아침 저녁으로는 스산하다. 따뜻했던 시절의 기억과 그 때 했어야만 했던 일들이 조각조각 생각날 때도 있지만 진정 무엇인지 확실히 인식하고 체감할 수는 없다, 어쩌면 체감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 모른다. 분명 빛나던 시절이었지만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절, 의도치 않게 그 때를 상기하게 되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는 그런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요컨대 자랑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양가적인 성질을 지닌 그런 기억이다. 그리고 그 때의 기억과 감정, 지금의 현실과 감정, 그 사이의 괴리 모두 어느 누구에게도 오롯이 이해받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그 앞에 떳떳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을 아무리 피하려 해도 개인은 외부세계까지 자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법이다. 히라야마가 전철에서 표주박 선생을 우연히 마주치고, 라멘집에서 옛 부하를 우연히 마주치듯이, 그리고 그 마주침은 내면세계에 충격을 주고 재인식을 촉발한다. 

히라야마는 옛 은사 부녀를 보고 딸을 결혼시키기로 마음먹었다. 몇달만 더 빨리 결심했더라면 좋았을, 하지만 영원히 미룰 수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뒤늦은 결혼식이었다. 옛 부하와 사별한 아내를 닮은 술집 마담을 통해서는 옛 해군 시절과 그리운 아내를 떠올린다. 옛 해군 시절은 아들들에게도 굳이 이야기하지 않은, 마주하기 싫은 기억이었지만 아내가 살아있고 서로가 사랑하던 그 시절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기억이다.

숙원의 결혼식이 끝나고 바에서 군함 행진곡을 청하는 주인공은 일련의 일들을 계기로 과거를 어느새 마주하고서는 이윽고 그 기억과 화해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것도 과거에 대한 미화나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과잉된 자부심이 아니라 대본영 발표 운운하는 만담을 듣고도 불쾌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마주함과 화해다. 한편으로는 집에 돌아와 중얼거리는 군함 행진곡에는 어떤 깨달음, 그것도… 정말이지 너무 늦어 버렸다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듯이 과거와 화해는 했지만 자기 인생에도 정말 황혼이 내렸음을 뒤늦게 깨달아버린 슬픔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건 표주박 선생과 그 딸의 슬픔과도 겹쳐 보였다.

가을날 먹는 꽁치의 맛처럼 고소하지만 한껏 비릿한 영화로 시작을 끊는 2020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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