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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어제까지의 세계

야우리 2020. 3. 19. 00:50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다. 

며칠 지독한 우울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왜냐고? 코로나 때문이지. 코로나에 걸린다 만다 이런 걱정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호시절의 끝이 생각보다 빨리 올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아니, 이미 왔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부로 EU 국가들 사이의 국경이 폐쇄되고 프랑스 등지에서는 외출사유서 없이 외출했다 걸리면 벌금형, 미국에서는 오후 8시 이후 통행금지, 캐나다도 국경폐쇄를 단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국이야 트럼프 당선 때부터 그런 조짐이 보였지만, 솅겐 조약이 눈 앞에서 하루아침에 이런 식으로 유명무실해질 줄은 몰랐다. 다시는 유럽 국가들 간에 전쟁이 없으리라는 세계사적 선언이었던 그것이 말이지. 한 번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지 역행은 생각보다 쉽게 일어나는 법이다. 한 번 역행을 시작하자 그 동안 서구 문명의 고상한 외피 아래 감추어져 있던 민낮은 드러나 버렸다. 꼭 서구에만 한정할 필요도 없다. 인간계 전체가 외피를 하나 벗어버린 느낌이니까. 앞으로 그 어떤 모습들이 더 드러나게 될까?

 

당장 내 주변만 봐도, 코로나 사태 이후 타인의 선의 그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된 경우가 부지기수다. 누가 너한테 대가 없이 도움을 준다고? 신천지일지도 몰라! 친구도 이웃도 믿을 수 없다. “ㅋㅋ 그 사람 신천지 추수꾼 아냐?” 농담은 언제나 그 이면에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으며,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 버린다. 가까이는 초행길에 길을 묻기 어려워 질 것이며, 간신히 다 떨어진 외피나마 붙들고 있었던 개인간의 신뢰, 우정, 사랑 이런 호시절의 가치들은 모두 의심받게 될 것이다. 개인간이건 사회집단에서건 모든 발화 - 그것이 선해보이거나 눈 앞의 이익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말하고 있을 수록 - 에서 어떤 사익 추구의 냄새를 맡아내기 위한 노력은 더욱 집요해질 것이다. 역으로, 당당하게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대놓고 써붙인 쪽이 각광을 받을 것이다. 우습게도 솔직함이야말로 언제나 제1의 준칙 아니었나? 이민자가, 난민이 아니라 자국민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세금도 안 내는 사람들을 왜 우리 세금으로 도와줘야 하나? 이미 여기저기서 보이는 모습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최근 수십년 간 유례가 없을 정도로 경제지표들이 추락했다. 이대로 모두가 망해 버릴 수는 없으니 경기 부양을 위한 공적자금이 투입된다. 공적자금은 어디서 나오느나, 세금에서 나온다. 방금 언급한 대로, 2008년에 한 번 속았으니 두 번 속을 리는 없다. 이 와중에 국제유가 또한 폭락중인데, 석유 수출로 외화를 버는 러시아와 중동에서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거긴 지금도 자신을 서방에 의한 희생자의 위치에 놓는 ‘저항적’ 민족주의나 종교적 극단주의가 무기의 비판이 아니라 물질적 힘을 가진 비판의 무기인 동네다.

 

이렇게 민족주의 흐름이 강해지면서 각 민족국가들이 배타적으로 될수록 지구적 단위에서는 자유무역이 아니라 블록경제로 회귀하는 흐름이 나타난다. TPP니 일대일로니 하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복잡한 세계체제 하에서 어느 국가도 독자적으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아갈수는 없으니까. 옆 나라 놈들을 믿을 수 없어도 그나마 얼굴 마주치며 살던 녀석들이니까 거래는 트고 살아야지. 여기서 남한(또는 통일한국)은 중국 블록이냐, 미국 블록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을 어떤 식으로든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 어디를 선택하건 거기 따르는 차이는 ‘대변과 소변 중 무엇을 먹겠는가?’ 정도의 차이에 불과하리라. 

 

그 때쯤 되면 어떤 정치도, 어떤 사회적 담론이나 학문이나 광의의 예술도 쓸모없어진다. 모든 말은 진정하지 않은 가짜가 되어버린다. 이건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가령 누가, 무슨 세력이 무슨 말을 하건 그 이면에 있는 ‘저 사람은 중국의/미국의 이익을 위해 저런 말을 하는 중국 돈 받은 중국 첩자인가/미국 돈 받은 미국 첩자인가’ 의 여부만이 중요해져서, 모든 것이 납작해져 양면으로만 다뤄질 테다. 예컨대 최근 ‘차이나 게이트, 조선족 여론조작’ 운운하는 현상은 매우 징후적이다. 

 

인간이 결핍된 것을 갈망하듯이, 사회와 그 시대정신도 그에 결핍된 것을 갈망하는 법이다. 모두가 진정한 것이 부재한디고 생각하는 사회는 진정성을 갈구한다. 모두가 선의의 가면을 쓰고 사익추구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자신들도 그렇게 살아가면서 솔직한 타자를 원한다. 이제 ‘진정하고 솔직한’ 사람들이 나타날 때다. 진정 대한민국을, 국민을, 청년을, 노동자를, 농민을 생각하기에 솔직하게 일자리를 빼앗고 사회 불안을 야기하는 이민자를, 조선족을 내쫓고, 사이비종교를 절멸시켜 버리고, 귀족노조를 무너뜨리고 외국 간첩들을 소탕할 그런 사람들 말이다. 

 

정확히 백 년 전에도 그랬다. 

 

또 다른 세계전쟁이 일어날까? 그건 모를 일이다. 그것을 논하는 건 내 능력을 벗어난 이야기다. 개인적 믿음의 층위에 한정해서 이야기하자면 인류가 지난 세월을 통해 배운 것이 있으니까 역사가 두 번이 아닌 세 번 반복되는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정도다. 다만 이 흐름은 한 둘의 정치인, 학자, 일국의 정당이나 계급적 역관계 따위가 제어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은 명징하다. 내일의 세계는 어제까지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를 것이다. 

 

너무나 비관적인 이야기일까. 여기 꼭 비관하기만은 어려운 지점이 있다. 앞서 ‘진정한 것’, ‘가짜’ 등을 언급했다. 갈수록 세계는 ‘진정함’ 과 ‘가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어떤 대상이 ‘가짜’일 수 있기 위해서는 어디엔가 그 대상의 ‘진짜’ 그러니까 진정한 본질이 존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은 자아와 외부세계의 분열을 인지한다는 뜻이다. 내 자아가 생각하는 세상의 진정한 무언가가 분명 있는데, 정작 세계는 가짜들로 가득하니까, 어떤 방향으로든 ‘이게 아닌데’ 싶은 생각들을 많이들 하게 된다. 이게 자아와 외부세계의 분열이다. 독일의 헤겔은 이러한 분열이 철학의 원천이라 말했고 이를 계승한 루카치는 ‘소설의 이론’ 에서 헤겔의 이야기를 약간 변주해 이 분열에 기반하여 소설 장르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요컨대 개인이 이 분열을 인식하고 극복하고자 하는 여정에서 근대 이후의 철학이 나오고 소설이 나오고 학문과 문예 같은 인간정신의 생산물들이 생겼다는 말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 분열의 골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국면이 당장은 학자와 예술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라도, 그 시대는 학자와 예술가들을 세상에 내보일 준비가 된 시대다. 

 

그리고 그 시대를, 5년이든 15년이든 학문과 예술 그 자체로는 아무 쓸모가 없어진 시기를 견뎌낼 이들은 정말로 ‘위대해질’ 것이다.

 

견뎌만 낸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나 혼자서만 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눈 밝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지나가면서 본 것 같다) 

 

정확히 70년 전에도 그랬다.

 

한 5년 전이라면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운운하며 내가 세계를 구제할 것 마냥 떠들어댔겠지만 이제는 그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잃지 않고 그 국면을 함께 견뎌낼 수 있을까, 이 정도 생각이면 족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우울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내일 또한 어제와 같을 것이며 우리는 삶을 살아갈 것이기에. 결국 진정 중요한 것은 정원을 가꾸는 것, 내일은 무엇을 먹을지 아기같은 고민을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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